내가 겪은 6. 25(5)
2006.07.15 00:45
내가 겪은 6.25(5)
_귀 향_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기택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덕천, 회천 등지를 거처 압록강에 육박하고 있었고, 동부전선도 풍산과 단천을 거처 혜산진과 성진에 이르고 있었음으로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도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전쟁은 국군과 유엔군의 완승으로 끝날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아니 하였다.
1950년10월25일
군번 없는 학도병들에게 귀가명령이 내려졌다. 수도사단 제18연대의 학도병은 22명이었다. 연대장 임충식(林忠植)대령 명의의 귀가영장을 받은 우리들 학도병들은 북청에서 트럭 2대에 50가마의 쌀(귀가비)을 싣고 귀향길에 올랐다. 차량으로 원산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울, 영남, 호남의 3개 지역 출신들이었으나 귀향할 수 있는 교통편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들은 원산부두 가까이 있는 동탁식당에 숙소를 정하고, 한동안 머물면서 교통편을 찾기로 하였다.
우리들의 교통편은 우선 북한 땅에서 남한 땅으로 가는 것이 문제였다. 북한은 철도 복구가 아직 안 되었고, 전쟁 중이라 남북을 왕래하는 차량도 없었다. 그래서 원산비행장과 원산부두에 대표를 보내기로 하였다. 원산비행장에 다녀온 대표들은 미군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으나, 원산시장(민정관)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원산시청에 다녀온 대표들은 신원보증을 못 받고 돌아왔다. 백방으로 설득하였으나 완강하게 거절했다며 실망이 컸다. 원산부두에 대표를 보내는 일은 계속되었으나 막연할 뿐이었다. 도보로 출발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유일한 자력수단인 도보로 갈수밖에 딴 도리가 없으리라.
하루하루 기대와 실망 속에 날짜는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한 달이 다 지나가는 날이었다. 원산부두에 파견된 대표가 희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포항에서 온 고래배 한 척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승선가능 인원은 10명 내외, 출발은 다음 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남과 호남인원 8명이 타기로 하였다. 쌀 50가마를 맡기고 숙식해온 동탁식당주인과 숙식비를 결산하고, 약간의 잔액을 분배받아 마침내 출발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원산에 온지 한 달이 지난 11월 27일!! 드디어 귀향하는 고래배에 승선하였다. 고래배는 겉으로는 작아 보였으나 승선하여 살펴보니 참으로 튼튼한 배라는 것을 알았다. 수상에 표출된 부분보다 수중의 선체가 튼튼하였다. 그래서 고래를 잡는 배이겠지 하고 안심하였다. 선장과 기관사 두 사람만 있어 조타실에 올라가 대신 조타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부유기뢰(浮遊機雷)가 있어 피하여야 했다.
원산을 출발하여 장천-양양-삼척-강구까지 4일이 걸렸다. 선주의 성화에 양양에서 승선대가로 중유 20드럼을 실어주었다. 우리는 강구에서 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갔고, 포항에서 영남사람들과 작별하여 기차로 대구를 거처 대전에 도착하였다. 서대전 헌병검문소에서 트럭을 타고 무난히 이리에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날이 저물었다. 숙식비는 없고 할 수 없어 나의 친구 집으로 찾아갔다. 우리들 4명은 친구 집에서 일박하고 세 사람은 전주로, 나는 정읍으로 향하였다.
이리-정읍 간 철도는 운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쌀장사들이 도르래(활차)를 이용하여 정읍을 왕래한다고 했다. 역에 갔더니 마침 정읍에 가는 도르래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곳의 주관자인 듯한 사람에게 승차를 부탁하였더니 주저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모양인데 그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 도르래가 당신 것이오? 국가 것인데 나같이 전방에서 몸 바쳐 싸운 군인이 못 탄다면 어느 놈이 탄단 말이오?”
이 말에 기가 죽었는지 타라고 해서 정읍 역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5km만 걸으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다. 역사 앞을 천천히 걸으며 그동안 묻어 둔 부모형제들의 안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인공 100일간에 걸친 우리 집의 수난은 갈음할 수가 없었다.
둘째형님의 안부가 제일 걱정이었다. 현직 경찰관이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경찰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문에는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고 총을 든 보초 두 명이 서 있었다. 그 보초에게 다가가 거두절미하고,
“6,25 전 0000주임이 현재 살아 계시냐?”고 물었다. 그들은 추가설명을 곁들였으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복경찰관이 들어가려다 말고, 보초들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에 근무한 0000주임 소식을 묻는다고 하니 그분은 바로 나에게로 다가와서,
“형님께서 군에 간 동생걱정을 하셨는데 오셨군요. 그런데 형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같이 근무했던 신 형사입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잠간만 기다리세요. 서장님이나 만나보고 가세요. 내가 갔다 올게요.”
하고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형님 없는 이 마당에 서장은 만나 무엇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 동초등학교 앞을 지나 마루고개 언덕을 힘없이 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형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런다고 죽었으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막상 죽었다는 말을 확인한 나는 내 인생도 함께 무너짐을 느꼈다.
내 둘째형은 나에게는 형이기 전에 나의 사표이고, 보호자이며, 후원자였다. 학교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익히며, 조도전대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공무원시험에 합격, 금융조합에 근무하였으나 일제의 육군 특별 지원병 령(1938,2,22) 및 징병 령(1942,5,9) 등살에 한 방편으로 경찰관에 응모하여 해방 전 근무한 바 있었다. 해방 후 여러 번 복직을 요청받았으나 불응하였는데 옛 상관이신 지금의 서장의 부름에 따라 복직했고, 믿고 사랑해 주신 분도 그분이셨다.
두서도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마루고개를 오르고 있는 나를 알아보고 부르는 분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동네 형님 한 분이 쫓아오셨다. 벌써 해가 저물었으니 자기 집에 가서 자고 가라고 하셨다. 해가 지면 북면 고향은 빨치산이 출몰한다고 했다. 그 형님의 집은 바로 마루고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그 형님과 같이 자면서 고향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집으로 가려고 마루고개로 나갔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바로 그날이 정읍장날이었다. 장 보려는 사람들이 벌써 많이 오고 있었다. 왠지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아니하여 마루고개위의 가게집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아이 어른 한 무리가 올라오면 가게에 들렀다 가고 또 쉬어 가는가 했는데, 그 속에는 이웃 동네분들이 있었다.
“저 군인은 외야꼴 감나무 집 아들 같은디,”
“아이고, 맞네! 군인 가서 죽었다는 그 아들이여!”
나는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멋적은 표정으로 그제야 인사를 했더니 바로 저 밑에 숙부께서 오고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그들과 인사만 주고받은 나는 곧 숙부께 달려가 인사를 드렸다. 숙부께서는 아버지가 바로 뒤따라 오셨으니 어서 아버지께 가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친구분과 천천히 걸어오시었다. 죽었다는 아들이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 한 채,,,,,,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우리부자는 얼싸안고 울었다. 장에 가던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아버지는 장으로, 나는 집으로 향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1950년12월 3일,140일(4개월 20일)만에 귀향하였다. 인공 100일천하를 벗어나 수복되었다지만 우리 고향을 내려다보는 칠보산에는 인민공화국기가 펄럭이고, 밤에는 아직도 빨치산들의 준동이 잦은 불안한 실태였다. 동생이 뒷산에 마련한 아지트(땅굴)에서 첫날을 보내며 동생에게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인심 및 동정 등 인공치하에서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학교에 복교하는 것은 차후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혼란스러운 상념 속에 귀향 첫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06,7,15.)
_귀 향_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기택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덕천, 회천 등지를 거처 압록강에 육박하고 있었고, 동부전선도 풍산과 단천을 거처 혜산진과 성진에 이르고 있었음으로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도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전쟁은 국군과 유엔군의 완승으로 끝날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아니 하였다.
1950년10월25일
군번 없는 학도병들에게 귀가명령이 내려졌다. 수도사단 제18연대의 학도병은 22명이었다. 연대장 임충식(林忠植)대령 명의의 귀가영장을 받은 우리들 학도병들은 북청에서 트럭 2대에 50가마의 쌀(귀가비)을 싣고 귀향길에 올랐다. 차량으로 원산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울, 영남, 호남의 3개 지역 출신들이었으나 귀향할 수 있는 교통편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들은 원산부두 가까이 있는 동탁식당에 숙소를 정하고, 한동안 머물면서 교통편을 찾기로 하였다.
우리들의 교통편은 우선 북한 땅에서 남한 땅으로 가는 것이 문제였다. 북한은 철도 복구가 아직 안 되었고, 전쟁 중이라 남북을 왕래하는 차량도 없었다. 그래서 원산비행장과 원산부두에 대표를 보내기로 하였다. 원산비행장에 다녀온 대표들은 미군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으나, 원산시장(민정관)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원산시청에 다녀온 대표들은 신원보증을 못 받고 돌아왔다. 백방으로 설득하였으나 완강하게 거절했다며 실망이 컸다. 원산부두에 대표를 보내는 일은 계속되었으나 막연할 뿐이었다. 도보로 출발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유일한 자력수단인 도보로 갈수밖에 딴 도리가 없으리라.
하루하루 기대와 실망 속에 날짜는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한 달이 다 지나가는 날이었다. 원산부두에 파견된 대표가 희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포항에서 온 고래배 한 척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승선가능 인원은 10명 내외, 출발은 다음 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남과 호남인원 8명이 타기로 하였다. 쌀 50가마를 맡기고 숙식해온 동탁식당주인과 숙식비를 결산하고, 약간의 잔액을 분배받아 마침내 출발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원산에 온지 한 달이 지난 11월 27일!! 드디어 귀향하는 고래배에 승선하였다. 고래배는 겉으로는 작아 보였으나 승선하여 살펴보니 참으로 튼튼한 배라는 것을 알았다. 수상에 표출된 부분보다 수중의 선체가 튼튼하였다. 그래서 고래를 잡는 배이겠지 하고 안심하였다. 선장과 기관사 두 사람만 있어 조타실에 올라가 대신 조타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부유기뢰(浮遊機雷)가 있어 피하여야 했다.
원산을 출발하여 장천-양양-삼척-강구까지 4일이 걸렸다. 선주의 성화에 양양에서 승선대가로 중유 20드럼을 실어주었다. 우리는 강구에서 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갔고, 포항에서 영남사람들과 작별하여 기차로 대구를 거처 대전에 도착하였다. 서대전 헌병검문소에서 트럭을 타고 무난히 이리에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날이 저물었다. 숙식비는 없고 할 수 없어 나의 친구 집으로 찾아갔다. 우리들 4명은 친구 집에서 일박하고 세 사람은 전주로, 나는 정읍으로 향하였다.
이리-정읍 간 철도는 운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쌀장사들이 도르래(활차)를 이용하여 정읍을 왕래한다고 했다. 역에 갔더니 마침 정읍에 가는 도르래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곳의 주관자인 듯한 사람에게 승차를 부탁하였더니 주저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모양인데 그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 도르래가 당신 것이오? 국가 것인데 나같이 전방에서 몸 바쳐 싸운 군인이 못 탄다면 어느 놈이 탄단 말이오?”
이 말에 기가 죽었는지 타라고 해서 정읍 역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5km만 걸으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다. 역사 앞을 천천히 걸으며 그동안 묻어 둔 부모형제들의 안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인공 100일간에 걸친 우리 집의 수난은 갈음할 수가 없었다.
둘째형님의 안부가 제일 걱정이었다. 현직 경찰관이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경찰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문에는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고 총을 든 보초 두 명이 서 있었다. 그 보초에게 다가가 거두절미하고,
“6,25 전 0000주임이 현재 살아 계시냐?”고 물었다. 그들은 추가설명을 곁들였으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복경찰관이 들어가려다 말고, 보초들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에 근무한 0000주임 소식을 묻는다고 하니 그분은 바로 나에게로 다가와서,
“형님께서 군에 간 동생걱정을 하셨는데 오셨군요. 그런데 형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같이 근무했던 신 형사입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잠간만 기다리세요. 서장님이나 만나보고 가세요. 내가 갔다 올게요.”
하고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형님 없는 이 마당에 서장은 만나 무엇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 동초등학교 앞을 지나 마루고개 언덕을 힘없이 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형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런다고 죽었으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막상 죽었다는 말을 확인한 나는 내 인생도 함께 무너짐을 느꼈다.
내 둘째형은 나에게는 형이기 전에 나의 사표이고, 보호자이며, 후원자였다. 학교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익히며, 조도전대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공무원시험에 합격, 금융조합에 근무하였으나 일제의 육군 특별 지원병 령(1938,2,22) 및 징병 령(1942,5,9) 등살에 한 방편으로 경찰관에 응모하여 해방 전 근무한 바 있었다. 해방 후 여러 번 복직을 요청받았으나 불응하였는데 옛 상관이신 지금의 서장의 부름에 따라 복직했고, 믿고 사랑해 주신 분도 그분이셨다.
두서도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마루고개를 오르고 있는 나를 알아보고 부르는 분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동네 형님 한 분이 쫓아오셨다. 벌써 해가 저물었으니 자기 집에 가서 자고 가라고 하셨다. 해가 지면 북면 고향은 빨치산이 출몰한다고 했다. 그 형님의 집은 바로 마루고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그 형님과 같이 자면서 고향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집으로 가려고 마루고개로 나갔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바로 그날이 정읍장날이었다. 장 보려는 사람들이 벌써 많이 오고 있었다. 왠지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아니하여 마루고개위의 가게집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아이 어른 한 무리가 올라오면 가게에 들렀다 가고 또 쉬어 가는가 했는데, 그 속에는 이웃 동네분들이 있었다.
“저 군인은 외야꼴 감나무 집 아들 같은디,”
“아이고, 맞네! 군인 가서 죽었다는 그 아들이여!”
나는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멋적은 표정으로 그제야 인사를 했더니 바로 저 밑에 숙부께서 오고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그들과 인사만 주고받은 나는 곧 숙부께 달려가 인사를 드렸다. 숙부께서는 아버지가 바로 뒤따라 오셨으니 어서 아버지께 가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친구분과 천천히 걸어오시었다. 죽었다는 아들이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 한 채,,,,,,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우리부자는 얼싸안고 울었다. 장에 가던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아버지는 장으로, 나는 집으로 향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1950년12월 3일,140일(4개월 20일)만에 귀향하였다. 인공 100일천하를 벗어나 수복되었다지만 우리 고향을 내려다보는 칠보산에는 인민공화국기가 펄럭이고, 밤에는 아직도 빨치산들의 준동이 잦은 불안한 실태였다. 동생이 뒷산에 마련한 아지트(땅굴)에서 첫날을 보내며 동생에게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인심 및 동정 등 인공치하에서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학교에 복교하는 것은 차후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혼란스러운 상념 속에 귀향 첫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0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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