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비닐우산의 추억
2006.07.20 09:55
파란 비닐우산의 추억
행촌수필문학회 황점숙
“투두둑 투두둑”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스럽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안개가 낀 듯 뿌연 거리를 우산을 받은 채 말없이 걷는다. 신발이 물에 젖어도 리듬 없이 연주하는 빗소리에 맞춰 걷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다. 직경 90센티, 둘레 약 300센티 공간에서 비에 젖어보는 여유와 낭만이다. 비 오는 거리가 좋아 무작정 걸을 때, 우산 속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쯤 의식하지 않고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한여름 장마철이면 나는 으레 가방 속에 3단 우산을 준비하고 외출한다. 행여 지갑이 비는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귀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든든한 동반자인 까닭이다.
내가 우산을 챙기는 습관은 어릴 적부터 오랜 자취생활 탓에 길들어진 것 같다. 아침에 화창했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서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학교정문에는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온 가족들이 교문을 가득 메운 채 기다렸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행운이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고향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리노라면 순식간에 교복은 젖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만다. 다음날 등교하려고 교복 말리기 전쟁을 치러야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아침이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 일기를 점쳐, 미리 우산을 챙겨야 했었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비 소식을 전해주는 날이면 나는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우산을 챙겨준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며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요즘은 우산이 3단이라, 잘 접어 가방 속에 간단히 넣을 수 있으니, 손에 들고 다니는 불편도 없고 잃어버릴 일도 없건만, 귀찮아서 싫다는 표정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파란색 비닐우산이 있었다. 집안에 몇 개 되지 않은 우산을 누가 들고 가냐 하는 문제부터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행여 내 차지가 되면 조심히 가지고 갔다 오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듣게 된다. 하지만 파란 비닐우산은 야속하게도 센 바람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채 벌렁 뒤집혀지면서, 우산살이 부러지고 한쪽이 축 처져 체면을 구기고 만다.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건만, 부끄러움보다 부모님께 죄송하여 걱정이 앞선다. 요즘 일상화된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면 버리게 되는 파란 비닐우산을 잊지 못하는 건 또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다.
결혼과 함께 내겐 우산 집 며느리라는 호칭이 더해졌다. 늦가을에 결혼하여 시댁에서 생활하던 시절, 어머님은 긴 겨울을 날 부업을 시작하셨다. 대나무로 된 우산살을 귀가 큰 바늘에 나일론실을 걸어 꿰매는 일이었다. 집안일을 거들고 어머님 하시는 일을 지켜보면서 시댁의 가업내력을 소상히 듣게 되었다.
아버님께서 가내수공업으로 우산공장을 30년 넘게 하셨다고 햇다. 대나무를 기계로 자르고, 다시 잘라낸 토막을 손으로 쪼개서 우산 살대를 곱게 다듬는다. 유일하게 자급자족을 하지 않고 사들였던 우산 꼭지를 중심으로 안대를 걸어 철사로 단단히 동여매 고정시킨다. 다시 지붕 쪽 겉대와 안 살대를 걸어 꿰매면 우산 뼈대가 완성된다. 거기에 비닐을 씌우고 끝을 인두로 지져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쳐 우산을 완성했다. 비닐우산보다 더 오래 전에는 들기름을 먹인 기름종이로 만든 지우산을 만드셨다. 비닐이 나오면서 종이우산은 사라졌고, 우산공장은 비닐우산의 전성기였던 6-70년대를 거치면서 사업도 호황이었다.
집안에는 언제나 지붕까지 쭉쭉 벋은 대나무가 빽빽이 세워져 있었고, 마당 한 가운데에서는 대나무를 절단하는 기계소리와, “탁 탁 탁” 대나무 쪼개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열 자 방 4칸 벽을 헐어 만든 공장 방에서는 늘 2-30명의 아가씨와 아줌마들이 빙 둘러 앉아서 우산 살대를 잇는 작업을 하셨다. 한편 집 주변에는 대나무를 싣고 온 대형트럭이 대기하는 날이 많았고, 동이 트자마자 일거리를 가지러온 사람들과 소매상 아저씨들의 짐 자전거가 대문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한겨울이 되면 공장 방을 따뜻하게 덥히느라, 새벽부터 안방 아궁이의 연탄불을 옮겨 넣는 일은 어머님 몫이어서 새벽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또 점심때가 되면 모아둔 대나무 토막으로 불을 때서 가마솥 가득 국을 끓여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으로 공장식구들 챙기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대나무를 실고 온 아저씨들과 타도에서 완제품을 사러온 사람들, 또 서울 재료 상에서 수금 차 오신 분들까지 늘 집안 가득 북적거렸던 손님들의 숙식을 챙기는 것도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집안은 늘 대나무에서 나는 먼지가 소복이 쌓였었다는 생생한 경험담을 얘기해 주시는 걸 듣고 어머님이 아직도 우산공장 시절을 잊지 못하고 계시다는 걸 느꼈다.
방수처리가 잘된 폴리에스텐 우산이 출현하면서, 비닐우산은 밀려나게 되었고, 80년대 초 아버님은 사업정리를 결심하셨다. 사업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비닐우산은 프로야구게임이 열리는 경기장에서나 소낙비와 함께 등장하는 일회용품으로 근근이 소비될 뿐이었다. 더 편리하고 유용한 제품에 밀리게 될 사양산업임을 간파하신 사업자의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 반평생을 바치셨던 사업이엇지만 회갑 전에 손때 묻은 기계 하나 남기지 않고 정리하신 것이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을 접게 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어머님은 한때 하청업자였던 분의 일거리를 얻어와 소일거리로 삼으셨다. 시댁의 가업을 알게 되면서 나 역시 파란우산에 대한 기억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조차 할아버지의 가업이었던 파란 비닐우산을 모른다. 요즘은 우산도 패션이라, 신세대들은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우산을 들고 다닌다. 신세대뿐이랴, 내게도 아끼는 우산이 몇 개 있다. 여름날 따가운 햇볕을 가리는 양산이 있고, 옷 색깔에 어울리는 우산 몇 가지는 갖춰 놓고 있다. 우산의 변천과정을 체험한 집안 식구답게 우산에 대한 애착이 많다. 우산살이 끊어지거나 휘어져 아이들에게 외면을 당한 우산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다. 이런 우산들은 어쩌다 비 오는 날 방문한 손님에게 일회용으로 쓰라고 챙겨주면 근사한 선물이 된다.
지루한 장마로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가끔, 아끼는 밝은 색 우산을 들고 근린공원으로 나간다. 오랜 갈증을 해소한 듯 푸릇푸릇 여름향기를 뿜어내며 하늘거리는 들풀, 간지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 도심 공해로 쌓인 먼지를 빗물에 깨끗이 씻어 버리고 우람하게 서있는 나무 등 초목들의 싱그러운 모습을 보면서 우산 속 공간의 편안함에 젖어 보곤 한다. (2006. 7. )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334 |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서 등단패를 받고 | 이민숙 | 2006.08.10 | 111 |
| 333 |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 태백에서 | 정현창 | 2006.08.06 | 118 |
| 332 | 배가 불러서 아름다운 여자 | 조종영 | 2006.07.25 | 233 |
| 331 | 내 자리를 찾습니다 | 조내화 | 2006.07.24 | 176 |
| 330 | 신문,그 화려한 변신 | 배윤숙 | 2006.07.24 | 216 |
| 329 | 나는 다시 정비공장에 간다 | 유영희 | 2006.07.22 | 130 |
| 328 | 간 없는 남자 | 유영희 | 2006.07.20 | 119 |
| » | 파란 비닐우산의 추억 | 황점숙 | 2006.07.20 | 169 |
| 326 | 쑥뜸 같은 친구 | 한애근 | 2006.07.17 | 99 |
| 325 | 정이 담긴 두 번째 숟가락 | 정현창 | 2006.07.16 | 88 |
| 324 | 겨레의 성산 백두산에 올라 | 이종택 | 2006.07.16 | 90 |
| 323 | 내가 겪은 6. 25(5) | 이기택 | 2006.07.15 | 96 |
| 322 | 꿈의 씨앗을 키우며 | 유영희 | 2006.07.13 | 108 |
| 321 | 행복 만들기 | 정현창 | 2006.07.13 | 89 |
| 320 | 신토불이 | 최정자 | 2006.07.11 | 135 |
| 319 | 돌아누운 어머니의 손톱 | 이은재 | 2006.07.11 | 118 |
| 318 | 화두 | 정현창 | 2006.07.08 | 94 |
| 317 | 또 다른 전쟁 | 박주호 | 2006.07.07 | 93 |
| 316 | 노트르담 성당 광장에서 외 1편 | 이은재 | 2006.07.03 | 197 |
| 315 | 뉴욕 리포트 1 | 장유진 | 2006.07.02 | 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