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4 18:03
분재
전희진
꺼지는 땅을 움켜 잡으려는듯
매점 안 텅 빈 의자들이
땅 속으로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위에 철퍼덕
주저앉는 여자의 가느다란 몸에서도
실낱같은 뿌리가 자란다
비 억수로 쏟아지고
땅 속으로 새어들지 못해
아스팔트 길 위에 미끄러지는 비의 긴 그림자
뚜껑 따놓은 지 오래된 청량음료처럼
그녀 말수의 위험수위와 몸 안의 물기가 점점 줄어들어
눈 가에 캄캄한 잎들이 돋아났다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그녀의 손에서
붉은 꽃망울 같은것들이 후두둑 떨어졌는데
앉은채로 그녀는 나무가 되어갔다
간혹 사랑의 한 순간이 일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뒷머리가 자꾸 뒷쪽으로 끌려간다
누가 잡아채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세게 분 것도 아닌데
뒷머리가 자꾸 뒷쪽으로 끌려간다
끌려가서는
애먼 사람의 통화 내역이나 엿듣다가
이웃집 앞마당이 펼쳐놓은
쓰레기 더미에 불 붙곤 한다
뒷머리는 없는 채 앞머리만 싸잡고
하루치 난간을 견딘다 알맞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괜한 힘을 뺀다
여행이 스트레스라고 스트레스를 생각하기 무섭게
스트레스가 발 빠르게 다른 스트레스와 손 잡고
말을 굴리며 저희들끼리 잘도 놀아난다
어디에고 정착을 못하는 중력 잃은 말들이
이국의 하늘을 이민자처럼 떠돈다
만리장성, 이층 연회장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만리의 장성에 끝까지 오를 수 있을까
양쯔강을 바라보며 수십년을 무료하게 누워 있던 수많은
난징* 민간인들의 녹슬은 뼈들이 뼈들의 손이
내가 탄 배 위로 기어 오르지나 않을까
거울을 봐도 뒷머리가 보이질 않는다
난징 대학살…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중국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잔악한 방법으로
대량 학살한(20-30만명), 세계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사건
-시와시학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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