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2019.02.17 00:19
봄날은 간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아니 뒤집혀져 있다 나자빠져 있다
아니 아니 봄을 증거 삼아 자기 몸을 뜯어내 상팔자로 퍼질러 있다
제 모가지를 댕강 잘라버리는 험악한 이 사건이
눈물 한 방울 쥐어짜지 않고 발라당 드러누워 땅을 녹이는 엄청난 이 일이
실로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듯
살랑살랑 봄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앞섶 풀어헤친 연분홍치마가
철퍼덕 맨살을 내동댕이친 이유는 연분홍에 신물이 나서다
분홍도 못된 연분홍을 파계하여 통 크게 일 한번 저질러 보고 싶은 거다
이를테면 조신한 침묵을 부숴버리고 싶은 거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반란을 일으킨 연약한 치마들
하나같이 첫사랑처럼 그윽한 분홍여자들
그윽하다를 그로스하다로 바꿔 몸속으로 들어간 분홍을 빼내는 작업은
부드러운 죽음이 홍조를 띤 채 제 몸을 스스로 가볍게 한다는 뜻
그러므로 아무도 슬프지 않아 곡哭도 없는 환한 세상을
연분홍치마가 재촉하여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이 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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