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2005.07.15 15:21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이 어 령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그 운(韻)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울 것이며
그 율조(律調)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서 본뜰 것이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振動)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의 진동이 바다 전체의 해류(海流)가 되는
신비하고 신비한 무한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시(詩)를 완성하거라.
당신의 시(詩)는 늪처럼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詩)의 의미는 바닷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긴 꼬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뭍에서 사는 짐승과 나무들은 표층(表層) 위로
모든 걸 드러내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작은 조개일망정 모래에 숨고, 해조(海藻)처럼 물고기 떼들은
심층(深層)의 바다 밑으로 유영(遊泳)한다.
이 심층 속에서만 시(詩)의 의미는 산호처럼 값비싸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바다는 대기(大氣)처럼 쉽게 더워지지 않는다.
늘 차갑게 있거라. 빛을 받아들이되 늘 차갑게 있거라.
구름이 흐르고 갈매기가 난다 하기로, 그리고 태풍이
바다의 표면(表面)을 뒤덮어 놓는다 할지라도
해저(海底)의 고요함을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고요 속에 닻을 내리는 연습을 하거라.
시(詩)를 쓴다는 것은 바로 닻을 던지는 일과도 같은 것이니….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바다에는 말뚝을 박을 수도 없고, 담장을 쌓을 수도 없다.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바다처럼 텅 비어 있는
공간(空間)이야말로 당신이 만드는 시(詩)의 자리이다.
역사(歷史)까지도, 운명(運命)까지도 표지(標識)를 남길 수 없는 공간….
그러나 그 넓은 바다가, 텅 빈 바다가 아주 작은 진주(眞珠)를 키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초승달이 자라나고 있듯이
바다에서 한 톨의 진주가 커 가고 있다.
시(詩)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한 방울의 눈물을 티운다.
그것을 결정(結晶)시키고 성장(成長)시킨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 바다처럼 하거라.
바다는 무한(無限)하지는 않지만 무한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당신의 시(詩)는 영원(永遠)하지 않지만 영원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위대(偉大)한 이 착각(錯覺) 때문에 거기서 헤엄치는 사람은
늘 행복(幸福)하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2017 문학축제 김종회 교수 강의 원고 | 미주문협 | 2017.08.24 | 311 |
공지 | 미주문학 USC 데어터베이스 자료입니다. | 미주문협 | 2017.08.14 | 287 |
14 | ‘첫사랑’찾아 중국 다녀온 95세의 피천득시인 | 미문이 | 2005.06.05 | 1246 |
13 | 詩的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미문이 | 2005.05.04 | 1438 |
12 | 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들 / 도종환 | 미문이 | 2005.05.04 | 1511 |
11 | 술이 없다면 詩人도 없다? /경향신문 | 미문이 | 2005.03.03 | 281 |
10 | ‘가장 따뜻한 책’… “아무렴,사람보다 꽃이 아름다울까” / 국민일보 | 미문이 | 2005.03.03 | 344 |
» |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 미문이 | 2005.07.15 | 1262 |
8 | 정현종 시인의 육필 수제본 시선집 | 미문이 | 2005.01.22 | 526 |
7 | 러시아어로 출판되는 신동엽·김춘수·고은 시인의 시 | 미문이 | 2005.01.22 | 1188 |
6 | 『05년 조선일보 당선작』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김승해 | 미문이 | 2005.03.14 | 317 |
5 | 아버지와 딸 2대째 '이상문학상' / 경향신문 | 미문이 | 2005.01.18 | 505 |
4 | 위트와 유모어의 문학/수필 | 미문이 | 2005.01.14 | 801 |
3 |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심사평 | 미문이 | 2005.01.18 | 456 |
2 | 신춘문예 詩 가작 시각장애인 손병걸 씨/부산일보 | 미문이 | 2005.01.18 | 516 |
1 | 김광수 / 시조의 존재 이유는 형식 | 미문이 | 2004.07.29 | 4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