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언어는 시장의 언어와 다르지요. 언어에 피가 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시인이며 그런 언어를 창조해 내는 것은 시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30여년 동안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웅숭깊은 시어로 표출해 온 이기철(62) 영남대 국문과 교수가 최근 열한 번째 시집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시라는 동아줄 양편에 자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대치시킨 뒤 팽팽하게 맞잡아 당긴 언어적 줄다리기의 산물이다.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중략)/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별이 뜰 때’ 일부)

풍경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 풍경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는 시적 화자는 그 말을 부엌의 접시들이 대신 들려줄 것이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접시들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정말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시적 화자의 상상력 속의 소리다. 언어적 줄다리기의 승자는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쪽이다. 마지막 연을 보면 그게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별이 뜨면 생기는 일이다”

별이 뜨는 것을 느끼는 주체는 귀뚜라미가 아니라 인간임은 물론이다. 이는 그의 시세계가 과거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등의 시집을 통해 보여준 자연 예찬에서 인간에 대한 내밀한 애정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월 푸른 숲 속으로 희고 깨끗한 새 한 마리 날아갈 때/한 사람의 푸른 마음속으로/사람들은 백조가 되어 날아간다/이 세상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이름/사람의 이름보다 향기로운 것은 없다”(‘마음은 때로 백조가 되어’ 일부)라든가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이다/(중략) 너는 몇 컬레의 신발을 버리며/예까지 왔느냐”(‘따뜻한 밥’ 일부) 등의 시편은 인간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담고 있다.

아울러 이번 시집은 시가 언어를 이용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귀하게 읽힌다. “사람들에겐 어제 하루도 인생이었다/풀잎들아,너희의 하루도 생이었느냐/너희들 순결 앞에서는/순결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불결이다/노래가 되려고 결심한 냇물이 아침을 씻는다/너희가 기울이는 외로움만 한 희망/이슬을 풀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다”(‘다시 풀잎’ 일부)

시인은 풀,냇물,이슬 등 자연적 상관물에 인생,희망,눈물 따위의 인간적 언어를 환치하는 순간,자연적 상관물은 불결하고 불경한 것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그의 시세계는 ‘이슬=풀의 눈물’이라는 인위적인 비유법을 초월한 지점에서 탄생한다.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제목시)에서 보듯 그는 바라보는 대상을 사실 그대로 비추는 언어의 직접성을 강조한다. 나아가 자연 곳곳에 널려 있는 작은 아름다움에서 사람의 아름다움을 읽어낸다.“저 산형(?形) 꽃차례의 베갯잇에 싸여/자주 깨어 으앙으앙 우는 아이처럼 사월이 온다/영혼에 금박 물린 꽃술이 어린 처녀 볼 언저리 연지처럼 돋고/선잠 깬 아이 기침처럼 콜록콜록 사월이 온다/작년에 지나간 들판을 밟으며 인간의 슬픔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월이 온다”(‘우산꽃에도 사월이’ 일부)

이씨는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등불이 된다”며 “그러나 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고 말했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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