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의 '술 메기'

2020.11.17 23:39

구연식 조회 수:18

우리 마을의 술 메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술 메기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시대 음력 7월쯤 농가에서 그해 벼농사를 마지막으로 논에 난 잡초를 뽑아내는 일 즉, 만물을 끝내고 날을 받아 술과 음식 그리고 풍물패가 어우러져 하루를 즐기며 노는 전통 민속행사이다. 익산시 왕궁면에서 제일 물이 좋은 곳은 우리 동네인 부상천(扶桑川) 마을이라 하여 예로부터 '일 부상천'이라 했다. 그래서 농사짓는 농업용수가 사계절 언제나 넉넉하고 지형적으로 관개(灌漑)가 잘되는 지역이라 가뭄과 홍수가 염려 없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특히 일 부상천이라 칭한 이유는 왕궁면에서 식수(食水) 또한 으뜸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마을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거주지의 최적 조건으로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위치를 갖춘 마을이다.

 

 농기구도 변변치 않고 농약도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그야말로 순수 친환경적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논농사의 마지막 행사로 의미는 같은데 표현이 여러 가지로 많다. 푸짐한 안주와 넉넉한 농주(農酒)를 마련하여 마시고 즐기는 술 메기’, 마지막 세 벌 김매기인 만두레’, 논 김매기의 유일한 농기구는 호미인데 한 해 농사일을 끝낸 뒤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호미를 씻어 걸어 둔다는 뜻에서 유래하는 호미 씻기(호미걸이)’, 농사가 가장 잘된 집의 머슴을 선발하여 황소 등에 태우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돌고 주인집에 돌아가서 술과 음식을 들며 즐기던 머슴놀이등의 공통점은 한 해의 농사를 마감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풍년을 기원하고 피로를 푸는 마을 잔치의 의미를 지닌 놀이다.

 

 술 메기를 하기 전에 걸립패(乞粒牌)를 조성하여 술 메기 때 필요한 음식과 비용 조달을 위하여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곡식이나 술 그리고 통돼지 등을 미리 기증받아 술 메기 당일 행사 음식으로 사용했다. 펄펄 끓는 가마솥 물을 퍼다가 가마니때기에 누워 있는 돼지에 연신 골고루 적시면서 부엌칼로 긁어대면 어느 사이 검정 털은 벗겨지고 하얀 살을 들어낸다. 아저씨들은 내장을 들어내고 정리하여 여러 개의 가마솥에 나누어 고기를 삶는다. 어린이들은 가마솥 부근에 옹기종기 앉아서 고기 익는 냄새를 맡으며 오랜만에 먹어볼 돼지고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가마솥 뚜껑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한참 김을 내뿜더니 드디어 고기가 다 익었나 보다. 아저씨가 쇠꼬챙이로 고기를 찍어서 안반에 올려놓으니 뜨거운 김 때문에 고기가 안 보인다. 김이 걷히니 아주머니들이 부엌칼로 숭덩숭덩 썰어서 나누어 준다. 바가지에 담겨 있는 왕소금을 찍어 먹었다. 그렇게도 맛있게 먹었던 술메기 날의 돼지고기가 또 먹고 싶다.

 

 주위 마을에서 또한 부러워한 것은 우리 마을에는 유명한 한약방이 있어 간단한 진맥과 응급환자를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마을에는 보약 다리는 냄새가 그칠 줄 몰랐다. 어쩌다가 다른 동네 어른들이 동네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서 한약 봉다리를 달랑달랑 들고 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그 한약방 집 할아버지가 서당 훈장님도 겸하셔서 동네 형들의 한자와 서예를 교습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서당 집 벌어진 흙담 사이로 형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일부러 서당 집 돌담길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왕궁면에서 물이 제일 좋은 마을, 의료와 교육시설도 있는 마을, 그리고 방앗간이 있는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았던 마을 어른들은 모두 다 돌아가셨다. 외래식물처럼 들어와 사는 타지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서 반갑기보다는 내가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다. 마을 옆 고속도로 진입로는 문명의 혜택이기보다는 추억을 갈라놓은 훼방꾼 같다.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드넓은 들을 워낭소리와 아저씨의 워워 소리를 서로 주고받으며 논을 갈기 시작하는 봄날부터 농사는 시작되었다. 못 줄을 움직이는 못줄잡이의 어잇어잇 소리에 맞춰 모를 심으면서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어있는 줄도 모르면서 뒷걸음치는 동네 사람들, 그해 벼농사에서 논에 난 잡초를 뽑아가며 마지막으로 세 벌 김매기가 힘겨워서 마을에서는 두레를 조성하고 노동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협동을 부추기는 풍물패도 합세하여 들판은 한바탕 두레의 잔치로 가득했다. 그리고 풍물패가 앞장을 서서 안내하면 집마다 고인 우물물을 퍼내고 청소하는 샘 푸는 일과 지덕을 밟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나오며, 마을 모정에서 마무리하면 두렛일이 끝나고 술 메기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소가 논·밭을 가는 일을 경운기가 대신하고 있다. 정겹게 모내기 하는 모습을 이앙기가 뺏아갔다. 마지막 농사를 마무리했던 두레패 대신 드론이 날아다니며 농약을 살포하며 윙윙거린다. 마을을 들썩거렸던 풍물패의 사물들은 마을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우리 동네 부상천(扶桑川) 마을은 중국의 지명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동쪽에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에서 유래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변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마을로 변했다. 모정을 허물고 새로 지어진 마을회관은 코로나-19 때문에 문이 잠긴 지 꽤 오래되어서 더더욱 을씨년스럽다.

 

 추석이 내일이다. 예년 같으면 풍물패 소리와 마을회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이장님이 좋아하시는 음악을 띄워 고향을 찾은 사람들을 반가이 맞아 주었는데, 이제는 코로나-19 안전수칙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의 섭리를 억압할 수 없고, 나만의 고집으로 세태의 흐름을 잡아둘 수 없다. 하늘의 하얀 구름을 잡아놓고 바라보고 싶어도 어느새 바람이 싣고 가 버린다. 그리운 임들 색동옷 입혀 살고 싶어도 임들은 계시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의 모든 것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2020. 음력 팔월 열 나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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