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꾸라이

2020.12.22 12:59

윤근택 조회 수: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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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꾸라이’






윤근택(수필가)







남몰래 간직한 비밀은, 특히 자신의 약점에 관한 비밀은 때때로 살맛을 더해준다. 자칫, 남들한테 그 약점이 들킬세라, 더러는 떨리기도 하지만, 이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려고 공부하다가 보면, 차츰차츰 늘어나는 지식과 경험으로 말미암아 살맛이 더해지는 것이다.

속된 말로, 나는 ‘개뿔도 모르면서’ 간 크게도(?), 전기와 설비를 함께 다뤄야하는 ‘아파트 기전주임’으로 수개월째 재취업해 있다. 숫제, 팔자를 뜯어고친 셈이다, ‘경비’를 하다가 ‘기전주임‘이 되었으니.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는 돈키호테다. 자연히, 겁 없이 덤벼든 일이라 난관에 부딪힌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요리조리 나사를 풀고 죄고 하는 등 문제를 해결하였다. 한마디로 쪽팔려서, 동료나 상사한테는 차마 내색도 못하고, 출퇴근 때에 내가 사는 아파트의 전기실로 은밀히 내려가 전기과장이나 전기주임한테 물어본 예도 있다. 심지어, 이곳 아파트 보유분 ’전기 테스터‘ 도 들고가서 사용요령도 그렇게 물었다. 그런가 하면, 재료상 사장한테 당해 부품을 살 때에 미리 조립, 분해 요령 등을 물어본 예도 있다.

이번에는 수도부품 판매상 사장을 꽤나 성가시게 했다. 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아파트의 셔틀버스 운전기사의 숙원사업(?)인 공용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 교체 문제로 빚어진 일. 벌써 세 차례나 그 가게에서 부품을 다른 걸로 바꿔 와서 수도꼭지를 갈아보려 했으나, 도대체 속 시원히 들어맞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

셔틀버스 운전기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우리 윤주임은 순엉터리야! 수도꼭지 하나도 제대로 못 가는[交替] 주제에 무슨 기술자?‘

해서, 이번엔 꼭 성공시키리라 마음먹고 그 가게를 다시 찾았다.

“사장님, 이틀 전에 사 간 그 세면대 수도꼭지 말입니다. 온수, 냉수 ‘투 웨이(two-way)’로 생겨먹었지만, 사실 우리는 온수를 아니 쓰니까, 온수 ‘파이프 라인’은 틀어막아야 하거든요. ‘마구리를 쳐야’ 한단 말입니다. ‘캡 타입(cap-type)’이어야겠어요. ”

그는 짜증을 내지 않고 ‘배관 캡’을 나한테 건네주어다. 그리고 어찌해서라도 배우려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다 보면, 기술이 차츰 늘어날 겁니다. ‘배관마개’는 이렇게 생겨먹은 ‘캡’도 있지만, ‘메꾸라이’도 있다는 것쯤은 아시겠죠? ”

그러면서 그는 볼트 형태의 ‘배관마개’ 도 한손으로 들어 보여주었다. 내가 그 부품의 쓰임을 모를 리는 없다. 다만, 그 부품명만 정확히 몰랐을 뿐이다.

지금은 한밤. 다시금 나의 야간 정위치인 전기실이다. PC의 검색창에다 ‘메꾸라이’ , ‘메꾸라’, ‘메꾸리’, ... ‘메꾸기’, ‘메우기’, ‘마구리’, ‘마감’, ‘막음’, ‘보족(補足)’ 등을 번갈아 입력해본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놀랍게도 모두 뜻이 통하는 말이라는 거 아닌가.


1. 메꾸라이 [うずめる; 埋める] : 묻다(매장하다), 메우다, 채우다, 보충하다, 가득하게 하다.

2. 메꾸라[めくら ; 盲] : 맹인, 눈이 보이지 않음, 문맹(文盲).

3. 메꾸리 : ‘메꾸겠다(메우겠다)’라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 여겨짐.

4. 메꾸기 : 시간을 적당히 또는 그럭저럭 보내다.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을 채우다.

5. 메우기 : 뚫려 있거나 비어 있는 곳을 막거나 채우다. 통 따위의 둥근 물체에 테를 끼우다.

6. 마구리 : 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 우리 쪽 (경북 청송) 어른들은, '마구리하다’, 또는 ‘마구리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7. 마감(←막음) : 어떤 일의 정해진 기한이 끝남. 또는 그때. 어떤 일을 잘 다루어 끝을 맺음.

8. 보족 (補足) : 모자라는 것을 보태어 넉넉하게 함.

(예를 들어, 도끼에서 도끼자루가 자주 빠지면, 그 헐렁한 도끼구멍에다 ‘패킹’을 채우게 되는데, 그 걸 내 아버지는 ‘보족’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위의 말들은 서로 뜻이 통하는 말들이다. 신기하게도, 일본어로 알려진 ‘메꾸라이’와 ‘메꾸라’는 우리말 ‘메꾸라(메우라 : ’메다‘의 명령문.).’와 그 발음과 뜻 면에서도 유사하다. 하여간, 건재사에서 또는 설비 현장에서 일컫는 ‘메꾸라이’는 ‘배관 마개’를 일컫는 말이다. 가령, 배관이 암나사형이라면, 즉 주름잡힌 질벽(窒壁)처럼 생겨먹었다면, '메꾸라이’는 당연히 수나사형이어야 한다. 게다가, 그 암나사와 궁합이 잘 맞아떨어지는 수나사형이어야 한다. 그 메꾸라이는 수나사이되, 그 질벽같이 생겨먹은 배관을 꽉 채우고 알뜰히 감아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바라는 목적이 비로소 달성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해야만 유체(流體)의 누설을 막을 수 있다는 거. 사실 배관 마감에 앞서, 수나사에는 언제고 ‘테프론 테이프( Teflon –tape)’를 감게 되는데... . 그래야만 장차 나사를 되풀 때에 용이하며 절연도(絶緣度) 따위가 높아진다는 거. 이 ‘테프론’은, 미국 ‘듀폰(DuPont)사’에서 개발해 판매하는 불소수지를 말한다. 본디는 ‘테프론’이 특정 회사의 특정 제품명이지만, 워낙 유명하여 일반화 되었고, 일반명사화한 예에 해당한다.

오늘밤에도 나는 이곳 전기실에서 밤 내내 불침번을 서게 될 텐데... . 어깨에 메는 공구가방은 분신(分身)인양 내 책상 아니, 작업대 위에 놓여있다. 그 가방 안에는 온갖 공구와 전기 및 영선(營繕) 부품이 들어있다. 갑작스레 일이 발생하면, 그 가방을 메고 랜턴을 켜 들고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갈 것이다. 실은, 그 많은 공구들과 그 많은 종류의 부품들이 다 긴요하다. 하더라도, 이 밤에는 특히 ‘아르키메데스’가 인류 최초로 고안해내었다는 ‘나사’의 위력을 새삼 느끼고 있다. 요즘 들어 하루도 요런 조런 나사와 나사꼴의 물품을 아니 다루는 날이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하거니와, 60여 년 살아오는 동안, ‘나사’ 내지 ‘나사꼴의 물품’의 위력과 고마움을 오늘만큼 느낀 적이 별로 없다. 내가 낮에 채운 수도꼭지도 나사꼴로 되어 있었다. ‘나사산을 지닌 배관’에 쓰이는 ‘메꾸라이’와 ‘캡’마저도 나사꼴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참말로, 나는 나사가 없는 세상을 이젠 상상하기도 싫다. 내일도 나는 이 아파트의 세대를 드나들며 나사를 죄고 나사를 풀 것이다. 그리고 사랑스런 나의 일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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