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전 상서(1)

2020.12.22 22:41

전용창 조회 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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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 상서(1)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전용창












“아버지,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마음속으로는 아버지를 한시도 잊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불러보기는 45년 만입니다. 그제밤 꿈속에서 아버지를 뵈었어요. 할 일이 있다며 일찍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다 늦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혼내지 않고 다정하게 웃으시며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하셨지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꿈속에서는 몰랐어요.

“아버지, 그날 무슨 일을 해야 했나요?”

꿈에 본 아버지 모습이 초췌하여 마음이 몹시 아팠어요. 볼이 쏘옥 들어가 있었어요.

“어디 아프셨는지요?”

아버지 쉬시게 하고 제가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는데, 대학생이라서 돈만 타다 쓰고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어요. 더구나 용돈도 한 번 드리지 못한 게 한이 되고 불효자란 생각만 들어요. 동생들한테 꿈속에서 아버지를 뵈었다며 기쁘다고 했어요. 동생들은 며칠 뒤 아버지 추도일이라서 현몽하셨다고 했어요. 꿈에서라도 아버지를 자주 뵙고 싶어요.



아버지, 이승은 ‘코로나 19’라는 해괴망측한 전염병이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내몰고 있어요.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고 말도 잘 안 해요. 웃음도 잃고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어요. 친인척의 애경사에도 부의나 축의금만 보내고 참석은 못 해요. 올해는 코로나로 산소에 가서 잡목을 제거하자고 했어요. 동생들이 날씨가 춥다며 조금 풀리면 가자고 하네요. 그런데 오늘 동짓날이라고 친구들이 영상으로 팥죽을 보내왔어요. 김이 나는 팥죽을 보니 그 옛날 아버지가 “죽만 먹지 말고 속에 있는 ‘새알심이’를 먹어야 기운이 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혼자 산소로 출발했어요. 가다가 시장에서 귤이랑 김이랑 샀어요. 쓸쓸한 거리를 달리다가 혹시나 하고 바로 아래 동생에게 전화하니 쾌히 승낙하여 함께 갔어요.



차 속에서 동생에게 말을 건넸어요.

“동생, 산소 가기 전에 둘째누나 먼저 보고 갈까?”



“형님, 그렇게 해요.”

언제라도 형 생각에 따라주는 동생이 훌륭해요. 누나에게 전화를 하니 반가워했어요. 누나는 유모차를 밀고 운동하고 계셨어요. 동생들을 보자 몹시 반가워했어요.

“누나, 얼굴이 많이 부었네?”

“종아리도 부었어.”

라며 하소연했어요. 형제라서 서로 의자하나 봐요. 둘째누나는 다른 누나보다 효심이 강했어요. 큰누나 시집갈 때 어머니는 막내딸 낳고 산후조리를 못하여 병석에 누워 계셨지요. 그때 누나가 갓난아기 여동생을 비락우유 물리며 업어서 키웠어요. 아버지, 누나 빨리 낫도록 빌어주세요. 작년에 둘째누나가 팔순이었어요. 9남매 가족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지요. 누나는 교회 권사님이시고, 매형도 전도했어요. 둘째딸은 목사가 되었고요. 아버지, 제가 전도를 하였을 때 언제 한 번 교회에 가신다고 하시며, 목사님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하니 그렇게 살면 누구나 부자가 된다고도 하셨지요. 가지고 간 귤과 김을 누나에게 전했어요. 누나는 고맙다며 가래떡을 두 봉지 싸주었어요.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이라고 하니 붙잡지는 않았지만 못내 서운한 기색이었어요.



“아버지, 누나 집에 들른 게 잘한 일이지요?”

막내누나 집은 전날 다녀왔어요. 요통으로 고생하셨는데 물리치료 받고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큰형님은 요양병원에 계시고 큰형수님은 요양원에 계셔요.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하세요. 형수님은 치매가 있으시고, 형님은 지난해 봄까지도 건강하셨는데 초여름에 전기장판 화상을 입고 그때부터 기력이 쇠진해지셨어요. 요즘에는 면회도 할 수 없어요. 요양원 창문을 통하여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계실 형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건강하셨다면 함께 나섰을 거예요. 그래도 정신 기운은 좋으셔요. 제가 병문안 가면 “동생 왔어?” 하시며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방역 규칙도 상관없이 제 두 손을 꼭 잡으셔요. 작년이 아홉 수고 금년이 구순이에요.

“아버지 산소 부근에 형님도 치표하신 것 아시지요?”

그곳이 가족공원이 되었어요.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은 ‘성작산’ 등산길로 개방되어 너무도 좋아요. 샛길도 열대식물 잎으로 짠 멍석을 깔아놓아 비단길 같아요. 동생들은 산소에 오면 등산까지 하고 간다며 좋아해요. 오늘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동생과 함께 재배를 했어요. 생전에 어머니께서는 “교인은 산소에 절은 하지 말고 묵념을 하고 기도를 드리라.”고 하셨어요. 저도 처음에는 어머니 말씀대로 했는데, 성경 말씀을 다 보아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지 부모님 산소에 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절도 하고 기도도 하면 더 효도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산소에 나 있는 쑥을 제거하고 아버지 산소 뒤쪽으로 가니 커다란 구멍이 있었어요. 추석에 갔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동생과 구멍을 막고 야무지게 밟아주었어요. 그곳으로 찬바람이 들어갔으면 얼마나 추우시고, 겨울에 빗물이라도 들어간다면 얼어버릴 텐데 미리 잘 왔다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이제 왔냐?” 하시며 할 일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그제야 알았어요.



보토를 마치고 산소 아래 소나무밭으로 갔어요. 아카시아를 제거하려고 동생과 교대로 톱질을 하고 약을 발랐어요. 물이 내리는 겨울에 제거해야 죽는다고 하셨지요. 형제가 함께하니 피곤한 줄도 모르고 쉽게 했어요. 소나무밭 아래에는 우리 집에서 가정부로 고생하신 복습이 할머니 산소를 허락했어요. 그분 후손들이 우리 가족을 보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몰라요. 아버지! 저도 올해는 몸이 아팠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생전에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기운을 냈어요. “사람 하나 똑똑하면 구족을 거느리지만 게을러서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 처자식도 굶긴다.”고 하셨지요. 아버지는 온 집안을 두루 다 살피셨지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도 도와주시고, 사촌 조카들 등록금도 내주시고, 우리 집에 기숙하게도 하셨지요. 시장에 가시면 팥죽이나 자장면을 사드시고 고깃국 한 그릇 드시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그때는 몰랐어요. 저도 아버지 유훈을 받들어 남은 생애 형제 우애하며 살겠습니다.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평안하세요.

(2020.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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