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w인

2020.12.25 13:25

전용창 조회 수:9

Know 人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전용창




  나는 ‘Know人’ 인가, ‘老人’ 인가? 내가 나를 모른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노인이 죽으면 한 개의 도서관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는데 그곳에서는 노인을 소중한 보배로 여기나 보다. 지혜가 있는 노인이 족장을 하는 것도 그런 연유인 듯하다. 빈곤과 질병 속에 살고 있는 부족을 이끌려면 경험이 많은 ‘Know人’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 경제 대국이 된 우리나라는 그토록 중시해오던 상강오륜도 사라져가고 65세 이상이 되면 무조건 ‘老人’으로 분류되고 있다. 의료와 복지시설 혜택으로 해마다 노령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권인 0.84명에 불과하다. 2026년에는 65세 이상이 20%에 이르러 최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는 통계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란 말이 아닌가?

  얼마 전에 어르신 인권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65세 이상을 노인이라 부르지 말고 ‘先輩 市民’이라 부르라고 했다. 선배 시민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 대국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며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가난에 쪼들리던 시절에 우리의 선배는 이역만리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고, 죽음의 전쟁터인 월남전에서 싸웠으며, 중동에 건설근로자로 나가기도 했다. 그 결과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 생명을 담보로 청춘을 바친 그들을 ‘老人’이라 부를 것인가? 노인보다 ‘선배 시민’으로 대접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삶의 절반을 일터에서 보내고 정년이 되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찾을 나이인데 노인으로 취급당하니 서글프지 않겠는가? 미국의 ‘사무엘 울만’ 시인은 그의 유명한 시 「청춘(Youth)」에서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고 했다.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는 청춘 예찬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처음 살아 보았고, 내일도 처음 살아 볼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 같은 세상을 사는데 누가 ’靑春‘이고 누가 ‘老人’이란 말인가?

  초등학교 시절이다. 방학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할머니한테 문안드리고 오라고 했다. 할머니한테 갈 때면 으레 아버지는 전날 준비한 소고기를 주셨고, 어머니는 할머니 내복을 예쁜 보자기에 싸서 주셨다. 나는 그때가 행복했다. 양손에 선물을 들고 큰집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 저 왔어요!” 외치면 사투리로 “우리 강아지 왔능가?” 하시며 버선발로 마당까지 나오셨다. 그때 나는 어른들한테 갈 때는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할머니는 갈 때 마다 할아버지를 원망하셨다. 생강 장사를 한답시고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기에, 할머니가 농사일을 하면서 아들 넷을 키웠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죽어서도 할아버지 곁에는 안 간다고 하시어 지금 두 분의 산소는 1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나는 부부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부모님한테도 많은 것을 배웠다.

 아버지는 낮에는 밖에서 식사를 하셔도 저녁은 언제나 집에서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 집 저녁 식사는 아버지가 오셔야 했다. 명절 전날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쌀 몇 가마니를 부었다. 그리고는 우리 집 농사일을 도우러 오는 동네 사람들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나는 종이에 적힌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오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분들에게 식솔이 몇인지 물어보고는 쌀을 차등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분들은 인사를 몇 번씩 하고 돌아갔다. 그때 오신 분들은 우리가 일할 때면 만사 제쳐놓고 우리집 일에 먼저 나오셨다. 나는 식사 자리를 통하여 가장의 권위를 알았고, 쌀을 베풀어 인심을 사는 법도 알았다.

  어머니는 출근길에 내 옷이 초라하면 다른 옷을 입고 가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출근 시간도 촉박하고 지금 옷도 좋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차 속에서 갈아입으면 되는데 말이다. 나는 매달 월급날이면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렸다. 어머니는 용돈이 목돈이 되면 다시 아내에게 주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금액을 말씀하시고는 “너만 알고 있어라.”고도 하셨다. 아내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줄 알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이 초라하게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집안일도 때로는 비밀이 필요함을 가르쳐주셨다. 외할머니가 새어머니임에도 한 번도 얼굴을 붉히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존경하는 효심을 통하여 낳으신 부모나 기르신 부모나 똑같다는 것을 터득했다.

  장인어른께서는 나의 반찬 투정을 고쳐주셨다. 내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고들빼기도 그때부터 먹기 시작했다. 쓴 음식은 소화효소를 내기에 좋고, 붉은색 채소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에 좋다고 하셨다. 제철 음식이 그때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라고도 하셨다. 기도를 하실 때는 가족 전체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시며 기도해주셨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장모님께서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봐주신다며 우리 부부에게 여행을 가라고 했다.  젊었을 때 부부가 여행을 많이 해야 나이 들어서 추억이 된다고 하시면서. 혼자서 여러 아이를 돌본다는 게 힘드셨겠지만 그리하셨다. 한 쌍의 학이 노니는 8폭 병풍을 밤마다 한 뜸 한 뜸 새겨서 유물로 남겨주셨다. 장모님께서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가며 우리 부부의 행복을 빌어 주셨으니 병풍을 바라보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내 탓이오.”라며 참는다. 그뿐이랴? 내가 배운 것은 또 있다.

 중학교 국어를 가르치셨던 ‘신석정 시인’ 선생님은 “우리말은 배울 게 없는데 연애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는 국어를 잘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아내는 나의 편지에 진솔함이 있어서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내가 할머니, 부모님, 장인, 장모님, 스승님에게서 보고 배운 게 오늘의 나를 부족하나마 ‘Know 人’으로 만들었지 싶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배운 지혜를 아들, 딸들에게 전수하고 싶으나 잔소리로 들을까봐 하루 이틀 날짜만 간다.

 아들은 필요한 정보를 아빠가 아닌 스마트 폰에서 얻는다. 그곳에 분야별로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다. 아빠니 컴퓨터와는 달리 자신들의 건강도 챙겨주고, 미래에 대한 조언도 해주며, 사랑도 주는데 말이다.

  나는 직장을 조금 빨리 명퇴하고 신학교를 다녔고, 부족하지만 목사안수도 받았다. “미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K 교수님‘을 만나 수필을 배웠고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지금은 시인 등단을 목표로 시 창작을 배우고 있다. 서툴지만 하모니카로 봉사활동도 다녔고, 집에서는 혼자서 바이올린을 거문고처럼 두드리기도 한다. 모든 게 ‘老人’이 아닌 ‘Know人’으로 남고 싶어서이다. 지금은 날마다 카톡으로 아들과 문자를 주고받는다. 아들이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 바라서이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터득한 것을 나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202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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