쏠베이지의 노래

2020.12.25 17:37

황복숙 조회 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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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안골은빛수필 창작반 황 복 숙














나는 내 서재에 몇 권의 책이라도 항상 꽂혀있기를 바란다. 꽃병에는 철에 맞는 꽃을 꼽고 날씨가 싸늘하지 않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두어 통풍이 잘 되게 하며 하얀 양광이 들도록 하고 싶다. 나는 하루에 그 창가에서 묵상하는 버릇을 갖도록 할 생각이다. 죄악의 바탕에서 삶을 꾸리겠다고 시시덕거리는 무대에서 나는 그 시간에 회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타이르고 경계하고 때로는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꾸지람에 대하여 자신을 변명하며 날로 새로워 질 것이다.

나는 돈키호테를 원치 않고, 햄릿 역시 원치 않는다.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나 롱펠로 외에 반 제린을 사랑하는 가브리엘 같은 청년을 좋아한다. 너무 낙관적이거나 염세적인 상황에 쉽사리 침식되는 소견이 얕은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가난한 정신을 가졌지만 부지런히 좋은 책을 읽으며 발전해 나가는 것을 기뻐한다. 때로는 가을의 하늘을 건너가는 푸른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창틀에 턱을 괴고 있거나 사양이 비켜 오는 해변에서 시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바라고 있다. 너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웃을 테면 비웃어도 괜찮다. 이 음습한 분위기에서 헤엄치다 보면 나 자신이 거칠어지고 성격이 비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비웃음을 참을 것이다.

나는 종교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신앙이 바다만큼이나 깊고 인자와 긍휼이 나의 내면에 철철 넘칠 수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이웃들과 같이 안식일에는 교회당에 찾아가고 구름 낀 하오의 언덕길을 비뚤거리며 달려가는 생활인들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나를 잊어버리는 습성이 내 몸에 익숙해지기를 빈다. 내가 바라는 생활은 빨강이나 노랑 파랑 같은 원색적인 색깔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다소 지성미가 있고 남으로부터 경멸당하지 않는 순백색이나 혹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연보라 색깔이다. 다만 창의적인 생활을 위하여 나는 이젤을 뒤뜰에 세우고 원색적인 색깔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나는 그 캠퍼스 위에 나의 높은 상과 욕망이 퇴색 되지는 않았나 하고 염려 할 수 있는 여유를 항시 갖추고 일상의 본도를 걷겠다.

나는 결코 곁눈질을 하지 않고 나 스스로의 내부에 지혜의 씨앗을 파종하여 구원한 미래를 점치련다. 나르시스에 몰입된 영화배우처럼 거만한 말투를 흉내내지 않으련다. 숱한 시인들이 인생을 찬미하고 인생을 무덤이라고 노래 하였듯이 나는 나 혼자만의 창작을 위하여 시계바늘의 움직임에 따라 부지런한 정신을 길러 둘 생각이다.

세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각본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사색의 창가에 낡은 의자를 내어 놓고 거기 앉아 눈부신 흰 구름을 짓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반쯤 읽다가 만 카 알 힐티의 수상록을 접어두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나직하게 탄식할 적마다 나무들은 커다란 손바닥을 흔들고 있다. 나뭇잎이 한 잎씩 지고 있다. 굴뚝의 연기를 휘몰아 간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너저분한 서재를 한참동안 정리하고 여름이 묻어 있는 구석구석을 털어내고 있다. 내가 바라는 생활이 나의 영지에 가득 넘치도록 기도하면서 말이다. 푸름이 솟구치는 비둘기 떼 화병에 꽂혀 있는 가을 산국화 겨울을 향하여 흐르고 있는 강물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허밍으로 가볍게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지성의 오솔길로 다리를 절며 걷겠다. 내가 바라는 생활이 그 모습을 보일 때까지.

(2020. 12. 25.)






롤랑 ; (1866 ~1944 프랑스 작가, 평론가,

장 크리스토프 ; 롤랑의 장편 소설 (1904 ~1912년 발표) 10권으로 1915년 노벨문학상 수상

롱펠로 ; (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

19세기 미국의 대중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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