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

2021.01.04 12:25

윤근택 조회 수:39

나무난로 앞에서 

 - 일백열세 번째, 일백열네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113.

  신선로(神仙爐) 모양의 무쇠난로다.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의 외손주, 으뜸이와 이 외할애비의 노변담화(爐邊談話)는 오늘도 이어진다. 늘 그랬듯, 나의 노변담화는 숫제 수목학 강의다. 사실 이 할애비는 산골마을에서 자라났고, 뒷날 대학에서 임학(林學)을 전공했다. 그리고 그 많은 전공과목 가운데에서도 ‘수목학(樹木學)’이 늘 매력적이었다.

  나무난로 불문[火門]을 열고 활활 타는 장작불 위에다 뒷산에서 미리 베어 온 파란 잎이 달린 노간주를 잔 가지째 넣어본다.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하면서.

  “한아버지, 양주인 진(gin) 냄새가 나. 글고(그리고) 난로의 무쇠뚜껑이 털썩거릴 정도로 ‘타닥타닥’ 소리가 나는 걸.”

  녀석은 이 할애비가 오늘 풀어갈 이야기를 압축하여 미리 다 이야기하는 것 같다.

  “으뜸아, 지금부터 이 할애비 이야기 잘 들어보렴. 이 나무가 바로 ‘노간주’야. 향나무와 더불어 측백나무과 향나무속에 속하는 ‘늘 푸른 뾰족 잎 나무(상록침엽수)’란다. 잎에는 기름기[精油, essential oil]가 많아서 언[凍] 생솔잎과 마찬가지로 이 한겨울임에도 생잎으로도 불감으로 아주 좋단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 할애비는 지난 날 시골집에서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던, 둔덕에 자리한 ‘운호’ 영감네 사랑방 아궁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한 바탕 들려준다.

 ‘내 아버지이시자 녀석의 외증조부이신 분의 땔감 전공과목은(?) ‘물거리’와 ‘아까시’였던 데 비해, 운호 영감의 전공과목은 ‘노간주’였다. 그 영감은 겨우내 소죽을 쑤는 아궁이에 갓 베서 지고 온 노간주나무를 즐겨 때곤 했다. 처마도 없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서. 꽤 떨어진 우리 집에서도 그 댁 무쇠가마솥 바닥을 자칫 깨뜨릴 만치 ‘탕탕’소리를 내며 노간주나무가 잘도 타곤 하였다.’

  녀석은, 조금 전 나무난로 뚜껑을 들썩이게 할 만치 ‘탕탕’ 소리를 내며 타는 노간주의 화력(火力)으로, 이 할애비의 생생한 기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노라고 한다.

  “으뜸아, 다시 이야기하지만, 노간주의 잎은 기름기가 많단다. 알파핀넨·미르센·카렌 등의 성분들. 그 기름성분들은 독특한 향기를 지녔기에 네가 말한 대로 양주인 ‘gin’의 첨가향료로 쓰인다는 거 아니니? 진은 노간주 열매[杜松子;杜松實]에서 얻은, 이른바‘주니퍼 베리’를 첨가재료로 풍미를 얻는 증류주란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진’이라는 단어가 ‘Geneva’의 축약이라고 서술되어 있단다. 노간주나무의 학명(學名)은 ‘Juniperus rigida’인 걸. 참, 언젠가 네한테 학명(學名)의 개념은 알려준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Juniperus’는 라틴어로서,‘Juino(젊음)’와 ‘Parere(생산하다)’의 합성어인데, ‘젊음을 생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이 ‘젊음을 생산한다’의 유래는 또 이렇단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1572~1609) 당시 영국 군인들은 네덜란드 군인들이 전쟁 전에 항상 무언가를 마신 후 용맹하게 싸우러 나가는 모습을 보았단다. 그들이 마신 것이 궁금하여 알아보니 바로 위에서 네게 말한 대로‘Geneva(네덜란드 진)’였던 거야. 그래서 ‘진’의 애칭이 ‘네덜란드인의 용기(Dutch's courage)’인 데에서.”

  외손주녀석, 으뜸이는 이 할애비의 이야기가 다소 지루한 듯 말한다.

  “한아버지, 노간주나무가 양주인 진의 원료로, 겨울철 땔감으로 ‘짱’인 건 알겠는데, 또 다른 쓰임은?”

  이 할애비가 기다렸던 말이다. 해서, 내가 추가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노간주나무는 소코뚜레로 쓰였던 나무다. 타원형으로 휘어도 언제고 탄력이 있어서였던 거 같다. 예로부터 소는 부(富)와 복(福)의 상징 가축. 해서, 소가 사용하는 물품을 귀히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노간주나무로 만든 소코뚜레를 집안에 보관하면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온다는 풍습 내지 미신으로 더러는 청실과 홍실로 치창한 노간주코뚜레를 집안에 달아놓곤 한다. 그래서인지, 노간주의 꽃말은 ‘보호’다. 조상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여겨, 조상의 무덤가에 향나무 대신 노간주를 심기도 하였다. 어디 그 쓰임이 그것뿐이었던가? 녀석의 외증조부이시자 내 아버지인 분은 살아생전 당신이 부치는 개간밭 산자락에 자란 원추형(圓錐型;송곳꼴) 노간주나무를 가지치기 하는 등 한,두 그루씩 손보아 두곤 하였다. 그러다가 제법 그 나무가 자랐다 싶으면, 통나무째 잘라 와서 도리깨 자루로 삼곤 하였다.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원줄기가 곧게 원추형으로 자라기에 도리깨 자루나 쟁기나무로 삼기에는 아주 훌륭했다. 내 선친(先親)으로부터 배워, 이 할애비는 닭장과 우사(牛舍)를 지을 때 뒷산에서 베어 와‘들보’로 쓴 목재도 사실은 5~6미터 자란 노간주였다는 거. 이밖에도 여타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열매 기름은 통풍· 류머티스관절염· 근육통· 견비통· 신경통 등에 두루 쓰인다.

  이번에도 녀석이 노변담화를 마무리한다.

  “한아버지, 요 다음에 으뜸이가 좀 더 커서이 ‘만돌이농장’을 떠나 아빠, 엄마한테로 돌아가면, 한아버지가 평소 즐겨하는 술을 꼭 개발할 거야. 그것도 노간주나무 열매로 만든‘으뜸이표 진’을.”

  녀석, 참으로 기특하다.

  또 다시 산골 외딴 농막에는 어둠이 내리고.


  114.

  이 할애비는 헛간에서 도끼와 괭이를 찾아 들고 와서 나무난로 불문을 열고 집어넣는다.

  “한아버지, 왜?”

  이에 할애비가 대답한다.

  "으뜸아, 너도 조금 전에 보았듯, 도끼와 괭이가 자루의 목이 부러져 있지 않던? 그걸 마저 쉽게 빼자면, 불에다 태우는 게 좋으니까.”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 그렇구나!” 한다.

  이젠 되었다 싶어, ‘알 도끼’와 ‘알 괭이’를 불집게로 집어낸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둔 물푸레나무자루를 망치로 박아댄다. 녀석도 돕겠다며 자루를 그 작고 고운 두 손으로 거머잡고 있다. 물론, 물푸레나무자루를 박기에 앞서 도끼의 구멍에다 ‘열십 자(十)’로 혹은 ‘*’꼴로 칡을 걸치는 걸 잊지 않았다. 지난날 내 아버지도 이렇게 하였다. 이렇게 쓰는 칡은 ‘고무 패킹(- packing) 대용이다. 녀석의 도움으로 도끼자루 메우기와 괭이자루 메우기는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

  이 할애비는 혼잣말을 하게 된다.

  ‘나야말로 그 동안 창작활동을 하느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던 게야.’

  그러자 녀석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라’의 유래를 캐묻는다. 우선, 그 이야기부터 들려주고 수목학 강의를 이어가야겠다.

  (이하는 ‘ DAUM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그대로 따옴.)

  ‘한자어로‘선유후부가설화(仙遊朽斧柯說話)’라고도 한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전설로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황해도 평산읍(平山邑)에 가마골, 즉 부동(釜洞)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선암(仙巖)과 난가정(欄柯亭)이 있다.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전한다.

옛날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 속 깊이 들어갔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 점점 넓어지고 훤해지면서 눈앞에 두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꾼은 무심코 서서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세워 둔 도끼를 집으려 했는데 도끼자루가 바싹 썩어 집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보니 마을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한 노인을 만나 자기 이름을 말하자, 노인은 “그분은 저의 증조부 어른이십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이상은 ‘ DAUM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그대로 따옴.)

  “한아버지, 아하, 그러한 설화가 있었구나. 사실 수필작가이기도 한 한아버지는 그 동안 글짓기에 열중이었으니... .”

  녀석이 기특하다.

  “으뜸아, 조금 전에 도끼자루로 쓴 나무는 ‘물푸레나무’야. 물푸레나무과 물푸레나무속에 속한 나무. 그 재질이 단단하고 무거우며 탄력이 있고 질겨서 도끼자루나 괭이자루로 안성맞춤. 물푸레나무속은 희랍어로 ‘Oleaceae’로 쓴단다. 이 과에 속하는 나무들 가운데에는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올리브’가 들어 있음에서 유래한단다. 그리고 물푸레속은 ‘Fraxinus’인데, 이는 ‘Ash’ 즉 재[灰]를 뜻하지. 그 껍질이 네가 지금 보고 있듯, 잿빛이 감도는 데서 유래한 거 같애. ‘물푸레’는 ‘물이 파래진다’는 데서 온 이름인 걸. ”

  이 할애비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녀석은 아까 이 할애비가 도끼자루를 만들면서 깎은 물푸레나무를 난로 뚜껑에 얹힌 물주전자에다 이내 집어넣는다.

  “한아버지, 맞아. 물이 파랗게 변해.”

  해서, 물무레나무를 ‘수청목(水靑木)’이라고도 부른다.

  “으뜸아, 물푸레나무의 껍질이 물을 파랗게 하니, 그걸 바라보는 네 눈도 파랗게 맑아지는 것 같지 않니?”

  누구의 새끼인지, 녀석은 이내 반응을 보인다.

  “한아버지, 맞아. 신통방통이야!”

  녀석한테 들려준다. 지난날 내 아버지이자 녀석의 외증조부인 분은, 마구간 일소[役牛]가 눈병을 앓아 눈곱이 달리면, 물푸레나무를 안약으로 쓰곤 했다. 세숫대야에다 맑은 물을 담고, 거기다가 갓 베어 온 물푸레나무 가지를 띄웠다. 그러면 물이 파랗게 변했다. 그 물로 암소의 눈을 씻어주었다. 물푸레나무는 안약이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내 아버지는 보리타작·벼타작·콩타작 등에 쓰던 ‘도리깨’의 도리깨열(-裂; 손가락 세 개꼴의 긴 작대기 조합)도 그 어느 나무도 아닌 물푸레나무 가지였다는 거. 이미 위에서 밝혔듯, 그 재질이 단단하고 무거우며 탄력이 있고 질겨서 도리깨열로 쓰였다.

  “한아버지, 물푸레나무의 쓰임은 참으로 대단한 걸!”

  녀석은 이 할애비의 수목학 강의가 날이 갈수록 흥미로운가 보다.

  “으뜸아, 이 할애비가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줄 게. 이미 여러 차례 너한테 들려준 바 있지만, 이 할애비는 1977년에 충북 청주에 자리한 국립 충북대 농과대학 임학과에 입학시험을 보았고, 합격을 했으며, 4년 동안 임학을 공부했단다. 그때 생물 과목 입학시험 문제에는 이런 게 하나 있었단다.

 ‘다음 중 세계에서 우리나라 충북 괴산과 영동에서만 자라는 나무는?’

  사지선다형 문제였는데, 그 답은 ‘미선(尾扇)’이었다는 거 아니니? 물론 이 할애비는 그 문제를 깔끔하게 맞추었지. 초등학교 육학년 자연 교과서에도 실렸던 거라서. ‘尾扇’은, 옛 역사극의 궁중 연회 장면을 보면 시녀 둘이 귓불을 맞붙여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부채를 해 가리개로 들고 있는 장면이 흔히 나오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미선이란다. 미선나무 열매는 꽃이 지고 처음 열릴 때는 파란색이지만, 익어 가면서 차츰 연분홍빛으로 변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갈색이 된단다. 하나하나가 작고 귀여운 공주의 시녀들이 들고 있는 진짜 미선을 보는 것 같단다. 하여간, 미선나무는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단다. 이 미선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과(科) 미선속(尾扇屬)에 속해 있단다. 이 미선나무는 1924년 미국의 아놀드 식물원에 보내지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934년에는 영국 큐(Kew) 식물원을 통하여 유럽에도 소개됐대. 그리고 이 할애비 재학시절, 학과 동기생이 자기가 사는 보은(?)에서도 미선나무 군락지를 발견하여 학계(學界)에 보고함으로써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바 있단다.”

  하여간, 외손주녀석 으뜸이의 총기(聰氣)는 알아주어야 한다.

  “한아버지, 언젠가 으뜸이한테 알려줬다? 한아버지 농장 뜰에 서 있는 저 ‘구상나무’는 외할머니가 지리산에서 아주 어린 나무를 옮겨다 심은 거라고 했어. 근데(그런데) 그때 한아버지는 구상나무도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나무라고 일러주었어. 그랬던 구상나무가 서구에 알려져 크리스마스트리로 빛을 발휘한다고 했다? 자랑스런 구상나무와 미선!”

  참말로, 녀석의 자존심 내지 자존감이 기특하다.

  “으뜸아, 네가 무척 좋아는 스포츠인 야구. 물푸레나무가 연봉 수십, 수백 억 원대 프로야구선수의 밑천(?)이라면?”

  녀석이 의아해 한다.

  “으뜸아, 프로야구선수들이 쓰는 방망이는 죄다‘구주물푸레나무(歐洲-)’로 만든다는 거 아니니? 이미 위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지만, 그 재질이 단단하고 무거우며 탄력이 있고 질겨서야.”

  외손주녀석 으뜸이는 박수를 ‘짝짝’ 치며 말한다.

  “물푸레나무,팟팅(파이팅)! 미선나무, 팟팅!”

  또 다시 산골 외딴 농막에는 어둠이 내리고, 나무난롯불은 사위어가고.

 

  (다음 호 예고)

  오리나무 ·말채나무·누운 향나무·층층나무 등의 이야기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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