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

2021.01.04 23:23

윤근택 조회 수:12

나무난로 앞에서

                                 - 일백열다섯 번째, 일백열여섯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115.

 “으뜸아, 창 너머 저 ‘선의산(仙義山)’ 꼭대기를 내다보렴. 이 ‘만돌이농원’이 자리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와 청도군 청도읍 운산리의 사이에 있는 해발고도 756.4 미터 저 산꼭대기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네. ”

  녀석은 “야! 아름다워!”하면서도 이내 그 꼭대기에서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을 안쓰럽게 여긴다.

  “한아버지, 저 나무들은 눈[雪]을 맞은 말의 갈기 같애. 어쩌면 참빗 같기도 하고. 근데(그런데) 산꼭대기에 서 있는 저 나무들은 겨울바람에 몹시 춥겠어!”

  ‘누군가가 녀석더러 예술가의 외손주가 아니라고 할까 보아서... .’

  “으뜸아, 한라산 높이는 ‘한 번 구경 오십시오(1950미터)’, 백두산 높이는 ‘이질설사(2744미터)’. 그런데 그 높은 산꼭대기로 차츰 올라갈수록 차차 나무들 키가 작아진다? 왜 그렇다고 생각해? ”

  녀석은 잠시 그 작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이마를 짚으며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는다.

  “아하, 떠올랐어. 언젠가 한아버지가 으뜸이한테 알켜(알려) 줬다? 나무는 자기가 자라는 산 높이 만치 이미 키를 따먹고 있으니, 굳이 자기 아래쪽 나무들 키와 견주지 않아도 되니깐.”

  맞는 말이다. 산의 맨 꼭대기에 서 있는 나무는, 키가 설혹 한 뼘에 불과하더라도 그 산에서 가장 높이 선 나무다.

  “으뜸아, 또 다른 숨겨진 비밀이 있단다. 백두산·설악산·한라산 등 높은 산에는 ‘눈-’이란 이름이 붙은 나무들이 산단다. 그것들 이름 앞에 붙은 ‘눈-’은 ‘눈[雪]-’을 뜻하는 게 아니라 ‘누운-’ 곧 ‘누워있는-’을 뜻한단다. 그러한 나무들을 ‘변이종(變異種; a variable species)’이라고 불러. 같은 종류의 개체 사이에서 형질 즉 유전인자가 달라진 종류를 변이종이라고 해. 변이종은 ‘생태종(生態種)’과는 다소 다른 개념인 걸. 생태종은, 변이종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에 속하나 사는 곳에 따라 다른 형태나 성질을 가지며 그 특징이 유전적으로 고정되는 생물의 무리를 일컬어. 사는 장소의 환경 조건에 적응되나 종 분화에까지 이르지 않으며, 변이종과 달리, 교배가 가능한 걸 생태종이라고 하거든. 변이종 가운데에는 누운향·누운주목·누운갯버들·누운산버들·누운잣나무·누운측백 등이 있단다. 이들 ‘누운-’의 나무들을 학명으로 표기할 적에는‘variable(변이성의)’의 약자인 ‘var.’을 붙여. 예를 하나 들어보렴? ‘var.sargentii Henry’라고 쓰면, ‘누운향’이야. ‘Henry’라는 분이 최초 명명했다는 뜻도 포함된 것이고.“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은 고개를 갸우뚱대며 말한다.

  “한아버지, 이번엔 너무 어려워. 변이종과 생태종의 개념 차이도 어렵기만 한 걸.”

  녀석의 어지럼증을 달래주려고 잠시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으뜸아, 백두산에서 자라는 ‘들쭉나무’이야기 네게 들려준 적 있지? 진달래과 산앵도나무속에 속하는 ‘키 작은 떨기나무(小灌木)’. 그 열매로 빚은 들쭉술은 북한에서 외국손님들을 접대할 때 자주 이용해서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 않았던?”

  그러자 술꾼인 이 외할애비의 유전형질을 일부 지녔음인지, 녀석이 입맛을 다신다.

사실 들쭉나무도 백두산·한라산 등 고산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 1미터 안팎으로 자라기에 변이종 또는 생태종의 개념과도 전혀 무관치 않다.

  “으뜸아, 하여간 ‘누운-’이 붙은 나무는 이미 위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같은 종에 속하나 사는 곳에 따라 다른 형태나 성질을 가지며 그 특징이 유전적으로 고정’되었단다. 해서, 가령‘누운향나무’를 환경이 좋은 곳에 옮겨 심더라도 다시는 위로 곧게 크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 자란단다.”

  녀석이 다소 안타까워한다.

  “아주 나쁜 환경에서 대를 이어온 나무는 환경이 나아져도 그처럼 유전형질로 굳어진다니!”

  이에, 이 할애비는 녀석한테 한마디를 더해 준다.

  “으뜸아, 하더라도 ‘누운-’이 붙은 나무들도 그 쓰임새가 있는 걸. 가령, 돌계단 사이사이나 비탈진 곳에 심긴‘누운향’은 관상가치가 매우 뛰어나니까.”

  오늘도 녀석이 노변담화 마무리를 짓는다.

  “한아버지, 높은 산의 꼭대기를 올라갈수록 차츰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굳이 뽐내지 않더라도 산 높이 만치 이미 키를 따먹으니깐. 글고(그리고) 니이체가 말했듯, 언뜻 약점으로 보이는‘누운-’도 ‘곱사등이의 혹’이야. 니이체는 곱사등이의 혹을 떼는 게 그로부터 생명을 앗는 짓이라고 했거든. ”

참으로 녀석의 ‘새겨들음’이 놀랍다.

  다시 산골 외딴 농막에는 어둠이 내리고.


  (다음 호 예고)


  오리나무 ·말채나무·층층나무 등의 이야기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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