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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우리 집의 설날
2007.02.23 09:44
우리 집의 설날
월담 김 종승
새해 아침 어렴풋이 눈을 떴다. 늦잠을 잔 것 같다. 남향집이라 햇빛이 깊숙이 들어와 내 작은 눈을 파고들었다. 몸을 위아래로 뻗으며 아기들처럼 배냇짓을 했다. 눈을 감으며 어젯밤부터 망설였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밖에서는 장모와 아내가 이른 새벽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식구라야 유학 중인 아들을 빼고 셋밖에 없는데 장모님의 일거리는 언제나 많다.
비교적 넓은, 아파트 베란다에는 형형색색의 꽃이 정갈하게 푸름을 한껏 자랑하며 늘어서있고, 크고 작은 장독대에는 알 수 없는 내용물이 가득하며 키대로 줄지어 서있다. 그 위 선반에는 온갖 색깔의 과일주, 인삼주가 병마다 가득차있어서 마치 술집 아가씨들이 한껏 뽐내며 손님 맞을 순서를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큰일이라도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와 부엌일을 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그녀는 생선 부침개를 젓가락으로 들고 와 자신의 입으로 호호 분 다음 내 입속에 쏙 넣어 주며 애교를 부렸다.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다음 아내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네식구가 호주에서 왔으니 이제부터는 형이 사는 대전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이번은 일이 있어 못 간다고 미리 말했으니 기다리진 않을 거고. 하지만 해마다 내가 차례를 지내다가 그냥 있으려니 너무 허전해. 국하고 따뜻한 밥만 올려놓고 절만 하자. 응?”
아내는 안색이 변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한 집 제사는 두 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고 모기소리로 말을 했다. 그 사이 우리의 얘기를 들은 장모가 밥주걱을 든 채 거실로 나왔다. “이보게 김 서방! 우리가 상을 차리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정말 제사는 두 곳서 지내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지내려면 차라리 형님하고 상의해 대전에서는 차리지 말라고 해야 돼.”
말이 끝나기 전에 나도 모르게 톤을 높이며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하지만 정식으로 차리는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밥만 올리는데 뭐 어떻겠어요?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요? 전부 형식이고 정성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나의 목소리 톤이 더 올라가는 듯하자 끼어들며 나의 편을 들었다.
“그래! 그렇게 해. 섭섭하면 해야지. 그런데 하려면 빨리 서둘러. 기덕이부부가 11시에 온다고 했어.”
하며 슬며시 장모를 부엌 쪽으로 밀었다. 장모는 못 이기는 척 돌아가면서도 뒷말을 남겼다.
“세상에! 두 집에서 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 어디 있어?”
나는 대강 세수를 하고 청소도 했다. 아내는 작은 상을 내려놓으며 정말 간단하게 차릴 거라고 나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래도 거들어준 것이 고마워 알았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뒤 작은 상 위에는 아내의 말대로 소고기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그리고 나물만이 올랐다. 조심스레 상을 위에 다정하게 찍은 부모님의 사진을 상에 올렸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보는 사진이지만 괜스레 죄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내와 장모는 부엌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새 와인 병을 뜯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정성껏 잔을 올렸다. 그러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거듭 드렸다. 그 때 아내가 나를 보며 시계를 보았다. 슬쩍 시계를 보니 11시 5분전이었다. 아마도 빨리 끝내라는 신호 같았다. 나는 있는 대로 여유를 더 부렸다. 그때 딩동! 하며 벨이 울렸다. 막내처남이 딸과 처남댁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다른 때 같으면 요란스럽게 맞이할 처남식구들을 나의 의식(?)때문에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슬며시 들어와 장모의 방으로 들어가며 살짝 문을 닫았다. 그 방에 들어가서도 모두는 목소리를 죽였다. 나는 혼자 음복(飮福)까지 하며 더욱 여유를 부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이면 내 쪽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장모님과 살게 되면서 양 사돈들이 마주치며 겪는 불편함 때문에 내 친척들은 발길을 끊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나의 친구가 모처럼 장모에게 세배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그리고 과일을 들려는데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매년 명절이면 찾아오는 고마운 장모의 조카들이었다. 모두들 시집장가를 갔고 그 자녀들까지 오니 인원수는 무려 십여 명이 되었다. 대형 봉고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모두들 함박웃음으로 들어오는데 장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놈도 안아보고 저 놈도 안아보고 누구의 선물 보따리를 먼저 받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사이 친구는 사과 한 쪽을 먹고 일어섰다. 나도 상황이 이런지라 건성으로 그를 잡으며 따라 나왔고 악수를 청했다. 미안하다며.
잠시 뒤 점심 식사가 나왔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명절 2주 전부터 장모님이 온갖 정성을 들여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조금 전 차례상과 대비가 되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로 약조를 했으니 이해는 되고 더 할 말도 없지만 섭섭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이중 탐스럽게 구운 조기 두 마리 만이라도 올랐으면 마음이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은 꼭꼭 숨기고 와인 병을 꺼내어 모두에게 돌렸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분위기가 익어갔다. 식사도 거의 끝나고 식구들은 장모를 안방으로 모시어 세배를 올린 뒤 나에게도 들어오라 했다. 나는 극구 사절했다. 아내는 내 눈치를 보고 슬며시 나를 밀며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내는 눈을 흘기며 그만 두라했다. 장모는 없는 돈에 내 몫까지 돈을 주느라 주머니를 몽땅 털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처가집 식구들은 잘 먹었다며 인사를 하고 모두 일어섰다. 장모는 몇 꾸러미의 보따리를 챙겼다.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생각에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같이 나왔다.
도산 공원을 한없이 걸었다. 나는 한시도 부모님을 잊은 적이 없다. 이런 명절날 특히 부모님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눈이 안 좋으셨던 어머니는 눈을 찌푸리며 음식을 만드셨고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나의 술 선물에 대견해 하셨다. 공원 비둘기가 오늘 유난히 나를 따랐다. 그들도 내 마음을 아는 듯 구구거리며 울어댔다.
운동을 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니 현관에 웬 아가씨의 하이힐이 보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삼촌!”
호주 사는 막내 여동생의 딸 ‘지연’이였다. 지연이는 애교를 부리며 나를 가장 잘 따르는 E대학 졸업반이다. 조금 전 장모가 자신의 조카들을 맞을 때처럼 나도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장모가 글을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썼을 것이다.
“사위는 조카딸을 맞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
식사와 후식을 한 뒤 지연이는 장모에게 세배를 하고 역시 많지도 않은 세뱃돈을 타더니 나에게도 절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지연’에게 절도 받고 돈도 많이 주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었다. 장모와 아내는 그런 나의 심정을 헤아리고 어떻게 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지켜보았다. 나는 지연에게 절도 받을 수 없고 또 돈도 줄 수가 없었다. 역시 팔짱을 끼고 처가 집 아이들에게 하듯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안심이 된 듯 아내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너희 삼촌은 원래 절 안받아!”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도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장모가 옆에서 또 한 소리를 보탰다.
“원 성질머리도 더럽네.”
썰렁한 분위기가 거실을 감돌았다.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라도 하듯 초인종소리가 났다. 현관문을 여니 둘째처남이 혼자 왔다. 그는 빈손으로 머리를 극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장모는 평소 나가 죽으라며 둘째 아들을 구박했었다. 나는 얼굴을 활짝 펴며 평소보다 더 반갑게 처남을 맞았다. 그는 처남이자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저런 수다를 떨었다. 어찌 보면 그가 오늘 나의 구세주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 집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고, 오랜만에 그와 나는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누며 술잔을 나눴다. 어쩌면 처남은 갑자기 왜 이 친구가 이렇게 정다운 척할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짐짓 입가에 미소를 담고 술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절은 참 좋은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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