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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10살자리 소녀가 겪은 6.25
2007.03.17 09:49
10살짜리 소녀가 겪은 6‧25전쟁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이의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50. 6. 25. 늦을세라 뛰어서 교문에 도착하니 집으로 되돌아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다음날 서울서 내려온 엄마아빠와 고모네 식구들로 집 안팎이 수선스러워졌다. 곧 인민군이 도착한다며 아버지와 고모부는 윗목의 장롱을 잡아당긴 뒤 좁은 공간을 만들어 숨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우리 집 사랑방을 본부로 삼고 부엌에서 밥까지 지어 먹었다. 조심스럽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전쟁이 난지 13일 만인 7월 7일, 유엔군이 참전하여 인민군을 점차 북으로 밀어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여 전국은 안전을 되찾아갔다. 인민군은 압록강까지 쫓겨 금세 남북통일이 되는가 싶더니,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다시 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여 전국이 피난민으로 넘쳤다. 아버지는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떠나셨고 엄마만이 아기와 광주(廣州) 할머니 댁으로 내려 오셨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언니와 오빠 그리고 나는 어른들을 도와 피난 갈 준비를 거들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닭졸임이다. 기르던 닭을 모조리 잡아 가마솥에 넣고 간장을 부어 졸였다. 참기름을 듬뿍 넣은 닭졸임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를 되돌아보면 우린 피난을 가면서도 단백질과 필수 아미노산을 섭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할머니의 음식 솜씨에 탄복할 뿐이다.
1951년 1‧4후퇴는 그대로 지옥이자 아수라장이었다. 뒤에서 밀려오는 피난민을 재우기 위하여 군인들이 강제로 주민들을 몰아내었다. 우리 할아버지 형제들은 마차를 준비하여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 위에다 어린아이들을 태워 출발하였지만 100m도 못가 마차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좁은 국도는 피난민으로 꽉 차서 떠밀려 가는 형국이었다. 어린 동생들도 상황이 안 좋은 걸 아는지 투정부리는 법도 없이 엄마 뒤만 졸졸 따라갔다. 도로 양쪽 아래 논바닥에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온갖 그릇과 보따리, 쌀 포대들이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집에서 얼마가지 않아 우린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소리의 주인공은 막내 이모였다. 우리 집을 목적으로 왔는데 우리 식구들이 이미 피난을 떠난지라 다시 길을 떠나려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8살짜리 어린 아들 호태가 안 보여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달려오던 중이었다. 지금도 그 사촌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당연히 엄마가 오겠지 하고 가다 보니 아는 사람이 없어 다시 되돌아오다 목소리 큰 엄마 덕에 쉽게 만났다고 했다.
한창 추위가 극성을 부릴 땐데 그해따라 날씨가 푸근하였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을 걸어 남으로남으로 가는 피난길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눈과 비를 맞으며 목적도 없이 떠밀려 가는 행렬은 그대로 죽음의 행렬이었다. 가다가 어두워지면 남의 집 부엌의 나뭇간에서 자기도하여 도착한 곳이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선인 진천 어느 산골 마을이었다. 빈 집을 찾아들었지만 그 곳도 피난민이 많아 좁은 방에서 포개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자다 일어나 소변이라도 보노라면 자리는 없어진다. 양쪽 벽에다 머리를 두고 얼기설기 자는지라 머리 들이밀 자리가 없어져 쪼그리고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간 식량이 떨어지자 엄마는 비상수단을 발휘하였다. 군인들이 민간인의 소를 뺏어다가 잡아먹고 버린 소 껍질을 주어다가 사람이 먹도록 끓여 먹었다. 털은 불에다 태우고 큰 가마솥에 넣어 끓일 적에는 산에 가서 청솔가지를 잘라다 불을 때면 연기가 눈을 뜰 수 없도록 너무 매워 눈물을 흘렸다. 그 질긴 가죽을 오fot동안 끓여서 쫀득쫀득하게 만들어서 한동안은 그것으로 연명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몇 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색은 거지가 따로 없었다.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몰골이며, 삐쩍 마른 몸에 걸친 남루한 옷가지들, 이고 진 꾀죄죄한 보따리들, 아무런 희망도 욕망도 없이 그저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엄마 등에 엎인 아기는 배가 고파 계속 칭얼거렸다. 그러다가도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나면 울음을 뚝 그쳤다. 조그만 뱃속을 채워줄 먹을거리조차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먹은 것이 없는 엄마의 젖이 나올 리 만무하고,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어느 마을에 들어가 보았지만 먹을 만한 것이 보이질 않았다. 엄마가 재차 동네를 뒤지러 가는데 뒤따라갔다. 동네에서 잘 살았을만한 집으로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오다 엄마가 뒤란으로 다시 돌아가더니 벼를 꽤 많이 찾아 가지고 나오셨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고사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는 추수감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면 뒤뜰에 모신 성주단지에 그 해에 걷은 벼를 넣어 두는 풍습이 있었다. 엄마는 그 생각이 나서 단자 위에 얹혀있던 지붕을 벗기자 항아리에 들어있는 벼를 발견하고는 성주님께 고맙다는 절을 몇 번이나 했다고 지금도 회상하신다.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 댁은 불에 타 검은 재만이 흉물스럽게 쌓여져 있었다. 동네에서 폭격으로 없어진 집은 작은 집과 우리 집뿐이었다. 부엌 나뭇광에 묻은 쌀가마는 온전하리라고 믿었는데 땅속에서도 불에 그슬려 화독내 때문에 먹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우리 식량의 전부였다. 갖은 고생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오자 열병이 온 동네에 퍼지기 시작하여 아기들이 약도 못써보고 하늘나라로 갔는데 결국 우리 집의 아가도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가가 떠나던 날 밤새 집 주위 담장을 맴돌며 울어대던 고양이 탓인가 싶어 지금도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그해 여름은 우리 민족이 모두 어렵고 힘든 해였다. 우리 집은 그나마 서울의 피난민이라고 원조물자인 메수수를 배급 받아 연명하였다. 불에 탄 집터는 걸음이 좋아서인지 호박덩굴이 무성하고 호박이 많이도 열었다. 메수수를 갈고 호박을 넣어 만든 풀떼죽을 처음에는 그런대로 며칠 동안이나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음식을 위장이 받아 드리질 않았다. 어른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라고 했지만 한 숟가락으로 연명만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도 불에 타서 야외학습을 하였다. 우리 반은 학교 뒷동산을 평평히 깎고 소나무에 양철판을 매달고 공부를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첫 시간이 끝나고 나니 으슬으슬 추웠다. 둘째 시간에는 춥고 졸음이 왔다. 학질이라는 병이 온 것이다. 조퇴하고 중간쯤 왔을 때 더는 갈 수 없어 보리밭에 앉아 졸다가 쓰러져 잠이 들면 학교를 마치고 오던 동네 친구들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오기도 하고, 해가 넘어가 추위를 느끼고서야 집으로 오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다른 형제들은 잘도 버티는데 유별나게 수수 풀떼죽조차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삐쩍 말라 여름 내내 마라리아로 시달렸다. 지금도 수수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냄새가 싫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서울이 정상화되어도 한강을 건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를 따라서 서울로 갈 때 한 번은 한밤중에 배를 타고 가는데 얼마나 무섭던지 깜깜한 물속에서 물귀신이 나와 팔을 잡아 다닐 것 같아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내리라는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한낮에 한강다리를 건너던 엄마의 재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강다리 양쪽 끝에 미군병사가 한 사람씩 지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한강 남쪽에서 병사가 졸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꾸벅꾸벅 졸기시작하자 발소리를 죽여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중간을 넘어서 꽤 많이 왔을 때 앞 쪽 병사가 우리들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우린 잽싸게 뒤돌아서 걷기 시작하였다. 소리를 뒤로하고 계속 걸으니 쫓아와서 총대로 서울 쪽으로 밀어내 서울로 들어 간 적도 있었다. 지난 일이니 쉽게 얘기하지만 전시체제에 통제를 뚫고 한강 다리를 넘어 다니는 위험은 목숨을 건 생활전쟁이였다.
수복된 서울의 거리는 을씨년스럽고 무서워 어둡기 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삼갔다. 동사무소 앞에는 배급행렬이 줄을 이었다. 전쟁고아들은 아침저녁 식사 때면 깡통을 두드리며 집집마다 찾아가 구걸하지만 그들은 항상 다리 밑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행히 엄마는 장사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식구들의 배를 채워주셨고, 할아버지의 한약방을 위하여 약재를 구해오시기도 하며 안정을 찾아갔다. 늦가을 어느 날 제2국민병으로 나가셨던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남루한 옷차림에 뼈만 앙상한 모습은 거지와 다를 바 없어서 얼굴을 보고서야 알아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날 밤 나는 남자도 통곡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 식사 후 슬그머니 나가시는 아버지를 뒤쫓았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손도 잡지 못하고 멀찍이 뒤를 따랐다. 집은 폭격에 간데없고 서리 맞은 호박덩굴만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집터를 멍하니 바라보다 동구 밖으로 발길을 돌려 모퉁이를 돌아가는 아버지를 다시 따라갔다. 아버지는 길가 나무아래에 앉아 울기 시작하였고, 울음은 통곡으로 변하였다. 나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아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 왔다. 그날 밤 일은 나의 비밀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첫 제삿날 그때 일을 형제들에게 얘기하여 나의 비밀이 하나 줄어들었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울 일이 있어도 참아야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그런 남자들이 전쟁이 나면 주역이 되어 앞장섰다.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가 버리고 앙상한 육체만이 남는다. 인성은 메마르고 앞길이 막막하여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그런 남자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통곡한다. 우는 남자가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잊혀지질 않는다. 개인간의 싸움이든 국가간의 전쟁이든 다툼이 없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 (2007.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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