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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산소 가는 길

2007.09.25 09:17

이강애 조회 수:106 추천:7

산소 가는 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이강애 오늘은 음력 8월 8일, 우리 부모님의 기일이다. 추석 일주일을 남겨놓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 몇 년 만인가? 언니랑 동생과 같이 세 자매가 제삿날에 앞서 산소에 가려고 나섰다. 산소는 일제시대부터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면서 사셨던 내 고향인 전북 임실의 신정리 덕림부락에 있다. 양지 바르고 온 들판이 펼쳐저 있으며, 그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냇물과 온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옛날 근무했던 학교 뒷동산에 모신 아버님의 묘소는 참으로 명당인 것 같고 아름다웠다. 몇 년 전에 갔을 때보다 사뭇 달라졌다. 숨이 가슴까지 차 오르며 걸었던 길인데 지금은 쭉쭉 뻗은 아스팔트 길이어서 승용차로 갈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이름 모를 풀과 본 적도 없는 나무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옛날 냇물에서 물장구치며 고기를 잡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머니 품 같은 내 고향, 꿈 속에서도 뛰놀던 그 곳, 봄이면 개구리 소리와 뻐꾹이 소리가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고, 여름이면 매미소리가 요란했고, 가을이면 귀뚜라미소리가 하모니를 이루고, 한 겨울 눈오는 날이면 눈 사람을 만들다 손이 시라면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알밤을 구워 먹던 내 고향이었다. 우리 세자매는 다 늙은 노인들이 되어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산소로 올라갔다. 산소에 도착하여, "어머니 아버지, 우리 세 딸이 왔어요." 하면서 수염을 깎아 놓은 듯 깨끗이 벌초를 해놓은 묘소 앞에서 기도를 하고 추억를 그렸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가곡을 부르니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듯 즐거웠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걸어 온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4남 4녀 8남매를 낳아 잘 기르셨다, 그런데 위로 오빠 네 분과 언니 한 분이 돌아가시고, 76세 된 언니와 70살인 나와 68세인 동생, 그렇게 세 자매만 살아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44세에, 동생을 46세에 낳으셨으니 지금 세상 같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사람들이다. 그러니 나와 내 동생은 덤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내가 7살 때 8.15 해방을 맞았던 곳, 어린시절의 내 고향은 그 어느 곳보다 경치 좋고 아름다운 곳이었다.그 곳에서 교장을 지내셨던 풍채 좋으신 우리 아버지는 하얀 모시옷을 입으시고 근무하셨고, 방과후면 운동장 앞에 있는 큰 둥구나무 밑 평상에 누워 부채를 부치시며 풀벌레소리와 매미소리를 벗 삼아 풍월을 즐기셨던 아버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애주가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늘 아버지가 즐기시는 가양주를 담가놓고 드렸는데 때론 직원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다고 불평을 하시면서도 늘 흐뭇해 하셨다. 그러시던 아버지어머니가 그 학교 뒷산에서 가을 벌판을 내려다 보시며 누워계신다. 두 분을 합장해서 왕능만큼 크게 만들어진 묘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에는 교장 전주 이씨 ㅇㅇ지묘라 씌어 있고 비석 뒷 면에는 아들 사위 손자 이름들이 가득 씌어져 있지만 어디를 찾아 보아도 딸들 이름은 없다. 딸들 없는 사위가 어찌 있으랴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옛날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엄마 아빠, 우리 세 딸들 가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산소에서 내려 오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누가 더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며, 동생과 방에 쌓아놓은 쌀가마에 올라가서 누가 멀리 뛰는가 내기를 하며 놀다가 내가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눈 주위가 4cm정도 찢어져 생긴 흉터이야기도 하였다. 산소 옆에 있는 밤나무에서 알밤을 주으면서 밤을 따려고 장대를 가지고, "때려! 때려!" 해서 때렸는데 그 밤 송이에 등을 맞은 언니가, "엄마! 얘들이 나 죽이네!" 라며 어린아이처럼 엄살을 피워 마냥 즐거웠다. 어릴 때 바람 부는 밤이면 새벽에 나가 밤을 주웠었다. 지금도 가을 바람이 불면 어릴적 그 추억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늘에서는 기러기가 날고 다람쥐가 나무사이에서 장난치는 산에서 우리는 흘러간 추억을 한아름 안고 내려왔다. 즐거운 성묘를 마치고 제사를 지낼 장 조카집으로 갔다. 군청에서 근무하다 작년에 퇴직한 환갑이 넘은 장 조카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그래도 집안의 대소사를 잘 다스리고 우애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집안의 어른이다. 이날도 깨끗이 정리정돈된 집에서 한복을 입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뉘 집이든지 큰 아들 큰 손자가 잘 되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세 자매는 제사를 마친 뒤 내년에도 꼭 다시 올 것을 약속하며 친정집을 나섰다. "고모님들, 건강하시고 안녕히 가셔요!" 친정 조카들의 인사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