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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작심삼일
2008.01.17 17:28
작심삼일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정순
새벽 2시30분경, 젯밥을 얻어먹고 닭이 울기 전에 저승으로 돌아가는 어느 영靈처럼, 섬뜩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나는 서울행 버스가 있는 곳으로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줄달음질쳤다. 트렁크 바퀴는 콘크리트도로바닥을 드르륵거리며 할퀴어 댔다.
늦가을인데 철 지난 여름옷을 챙기는 것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큰일을 여러 번 치른 관계로 자식들한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이번엔 알리지 않고 다녀오기로 했다. 가방을 꾸릴 때면 유난히도 멋진 원색의 옷가지들을 챙기느라 요란을 떨었는데 이번에는 대충 챙겼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경비실 앞에 이르렀을 때다. 몇 년 전 제주도에 다녀왔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꼼꼼하게 집안을 단속하고 갔건만 돌아와 보니, 냉장고문이 열려 냉각기가 꽁꽁 얼어 고드름이 달렸고, 전축테이프가 계속 돌고 있었으니 만약 과열로 불이 났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가스 스위치는 제대로 잠갔는지, 전기스위치는 껐는지 꺼림직 했다. 다시 올라가 다시 점검을 하고 약속장소로 갔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장은 언제 했는지 다들 화사한 차림들이었다. 이제부터는 집안 걱정일랑은 안녕이다.
드디어 버스는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차창 밖은 아직 어둠으로 가득했다. 뜬눈으로 밤을 샌 가로등만이 잘 다녀오라며 가는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열한 달 만에 다시 여행길에 오르니 마음은 느긋했다. 버스 안에서 32명의 명단을 확인하느라 신일관광 사장님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여권은 아예 단체로 걷어가 버렸다. 책임자의 말은 항상 같았다. 개인행동은 금물, 일행 놓치지 않기, 짝꿍도 챙기고, 이름표를 목에 걸고, 모이란 장소에 시간 지켜 모이기 등 주의사항으로 일차 점검은 끝났다.
비행기 출발시각까지는 3시간이나 남았다. 새벽잠을 설쳤지, 아침밥을 걸렀지, 눈 뚜껑이 자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단체로 준비해온 아침밥을 먹으려고 공항 한쪽에 자리 잡고, 소독저며 구운 김을 한 봉지씩 받아 쥐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며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택시 안에다 찰밥이며 맛있게 버무린 겉절이 등 준비해온 아침식사꺼리를 통째로 놓고 내렸다지 않는가. 자기 가방만 가지고 내린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내 행동이 생각나서 식사준비 하느라 수고했다며 즐거운 여행이 되자고 격려 해줬다. 32명의 아침식사는 공항 내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자유로이 면세점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며 탐승시간을 기다렸다.
여행길에 오를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은 절대로 선물이고 뭐고 쇼핑은 아예 생각지도 말자, 그리고 가이드 말에도 넘어가지 말자며 결심들을 단단히 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건은 절대로 사오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긴 탐승시간을 면세점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무난히 넘기고 비행기에 탐승했다. 드디어 10시4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을 향해 비행기는 날아올랐다. 일행들은 재잘거리며 가져온 간식을 나누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아까의 불평은 까맣게 잊고 여행이란 즐거운 낭만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행할 때 기내식은 마치 소꿉장난 하는 것 같다. 음식 맛은 우선 제쳐놓고 올망졸망한 식사도구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영어를 못 읽어도 소금, 후추봉지는 뜯어서 맛보면 알고, 단지 촌스런 먹성 탓에 적당히 익은 김치나 좀 주었으면 하는데 언감생심이다. 현지음식을 먹어보려고, 아니 챙기는 것 자체가 귀찮아 나는 고추장이나 김 같은 밑반찬을 따로 챙겨가지 않는다.
그래도 몇 차례 나라밖여행을 다녀봤건만 촌스런 행동은 여전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를 3쾌라고 하던데, 2쾌까지는 잘되지만 ‘잘 싸고’가 잘 안되니 이 또한 촌스럽기 그지없다. 만약에 나 혼자서 여행길에 나섰다면, 까다로운 절차를 척척 밟으며 목적지를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나는 작심삼일을 무척 싫어한다. 왠지 신용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고, 주견 없이 그저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다. 그래서인지 웬만하면 다짐이나 결심을 하지 않는 편이다.
마지막 날 캄보디아에서였다. 천연고무로 만들었다는 라텍스라는 제품에 홀딱 빠져 그만 카드결재를 하고 말았다. 캄보디아에서 생산되는 천연고무로 만들었다는 침대 시트와 베개를 샀다. 물건 값이 우리나라에 비해 엄청 쌀뿐더러 세균감염과 목병에 좋다는 말에, 쇼핑은 아예 안해야겠다는 결심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청구서에 마치 사장이 결재하는 것처럼 달필로 사인을 했다. 상점주인 말이 더 걸작이었다. 나보다 물건이 더 먼저 집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던가.
5박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화장실문을 여는 순간, 또 한 번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다시 올라와서 그렇게도 꼼꼼히 문단속을 했건만 화장실에 불이 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건망증인가 세심증인가. 아기를 너무 잘 낳으려다 째보를 낳았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나도 어느새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허, 참!
여행이 끝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절약은 미덕이다.’ 란 캠페인이 요즘은 ‘절약만이 미덕은 아니다.’로 바뀐 추세인데 나도 한몫을 한 셈인가. 쇼핑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라텍스를 샀으니 말이다. 적당한 소비는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핑계대면 될까? 소비도 하면서 즐겁게 살면 이 또한 젊게 사는 비결이라고 자꾸만 나 스스로 자위해 본다.
(2008.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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