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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까치까치 설날은 가고
2008.02.12 16:45
까치까치 설날은 가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오명순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전라선 순천행 기차에 올랐다. 이 기차를 탈 때마다 불만이 있다. 터널이 너무 많아서 창밖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을 토막내서 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갈 때마다 시집을 꼭 챙겨 가지만 서너 편 읽다가 접곤 한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설 명절이라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가족과 함께 타고 있었다. 기차 안은 모처럼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행복하고 환한 웃음으로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
설날이 와도 요즘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어린 시절에는 설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그것은 예쁜 설빔을 얻어 입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였다. 먹을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 넉넉치 않은 집에 식구들은 많아서 풍족한 명절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맏딸인 나에게는 새 옷을 사 주실 때가 많았다. 일곱 살 때던가, 꽃이 예쁘게 그려진 골덴 옷 한 벌을 사 주셨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는 골덴옷 입은 애들이 몇 명 되지 않는 귀한 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이십 리 떨어진 읍내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아직도 나는 소중하게 가지고 있다.
열흘쯤 전부터 어머니는 설 준비로 바쁘셨다. 콩을 불려 맷돌에 갈아서 두부를 만드셨고, 떡을 찍어 먹을 조청을 만들 때는 오랜 시간 또 불을 잘 조정해야 해서 왕겨불 연기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 한과 만드는 일은 더 복잡하고 힘들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내셨는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음식들을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가마솥을 이용하여 만들어야 했기에 설날 무렵이면 방바닥은 발이 데일 만큼 끓었다. 동 트기 전 차례를 지내고 나면 서둘러서 아침을 먹어야 했다. 동네 어른들께 세배 드리는 풍습이 있어서 아침부터 세배 손님들이 몰려 오기 때문이었다. 나이 많은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집들은 집집마다 세배 손님들로 북적댔다. 준비해 둔 세뱃돈을 주고 받고 음식과 덕담을 나누며 서로가 복을 빌어 주는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언제부턴가 명절에 한복 입은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어쩌다 고운 한복을 입은 이를 보면 신혼부부이거나 아니면 어린아이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결혼하고 첫 명절날 인사길에 한복을 입고 가는 것은 오래오래 좋은 풍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 어쩌면 그들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불편하다는 핑계로 장농 깊이 넣어 두고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옷으로 인정 받은 우리의 한복이 언제부터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됐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생활이 서구화되었고 한옥이 아파트로 바뀌었으며 버튼만 누르고 명령만 하면 되는 편리한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넉넉해졌는데 한가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한복을 멀리 해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한복을 연구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서 고유의 한복도 유지하고 한편으로 조금씩 변형시켜 우리가 쉽게 입을 수 있도록 더 많이 보급하면 좋겠다.
순천만 갈대밭에 도착했다. 비릿한 물내음과 함께 갈대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유난히 긴 설 연휴를 가족들과 함께 이런 곳에 와서 즐겁게 보내는 그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행복해 보였다. 길을 따라 걷기보다 오늘은 배를 타기로 했다. 행복해 보이는 그들에게 떠밀려 걷기 싫어서이기도 하였지만 살아 있는 늪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였다. 사람들이 많아서 배 다섯 척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탈 수 있었다. 물이 많이 빠져서 배가 겨우 움직이는 듯했다. 철새떼를 보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늪도 보이지 않았지만 가끔 청둥오리 몇 마리가 앉아 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 넘어가려는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눈과 가슴으로 찍어 기억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살면 안 되는가. 나를 묶고 있는 올가미들이 나를 더욱 조여 올 때면 심장이 요동을 친다. 산허리에 걸려있는 저 붉은 해를 두 손으로 톡 따서 가슴에 안아 보았으면.
내려 놓기로 했다. 어디까지 내려 놓아야 하는 걸까. 내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두 어깨를 누르고 있는 이 중압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나는 이토록 내려 놓고 싶어 하면서 모두 내려 놓지 못하는걸까. 내려 놓기보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서 도망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다.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나 온 것은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뒤죽박죽이던 온갖 생각들이 제 자리를 찾아 줄을 서고 찬물에 세수를 한 듯 개운해졌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 섞여 있는 나를 찾았을 때 작은 행복이 몰려왔다. 꼬여진 마음과 이유없이 싫다며 뿌리치는 소견머리와 묵은 감정들을 털어내었다. 박하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달콤해졌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새싹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남녘에는 벌써 저만치 봄이 와 있었다. (2008.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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