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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불타면서 말한 것

2008.02.25 05:59

김정남 조회 수:109 추천:12

숭례문(남대문)이 불타면서 말한 것

                                                                             김 정 남(언론인)

그 전날 TV를 보지 못했던 나는 이튿날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남대문이 불에 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문에서 불에 타고 있는 남대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 무슨 불길한 조짐인가 정처 없는 불안까지 겹쳐오는 것이었다. 과연 남대문의 화재는 강 건너 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안에 남대문이 그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는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누구의 시구처럼 “우리가 무엇이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비로소 그 참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놀란 가슴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서울과의 생면(生面)은 남대문과의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 역시 1961년,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역에 내렸을 때, 역 앞으로 크게 뚫린 큰 길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던 남대문과 생면을 했다. 그때는 주변에 남대문보다 더 키가 큰 건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전에는 특히 남대문이 서울이 상징이요 그 관문이었다. 서울에 갔다왔노라고 자랑하는 사람한테 “그래, 남대문이 어떻게 생겼던가. 현판은 어떻게 걸려있구?”하고 물어 그 자랑의 진위를 가늠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남대문과는 이런저런 사연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불탄 남대문을 모든 사람들의 감회를 더욱 비감하게 하고 있다.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비로소…”

돌이켜 보면 남대문이 저렇게 될 조짐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2005년이던가, 국보1호는 남대문 말고 문화재적 가치에 따라 새로 정해야 한다고 감사원과 문화재청이 찧고 까불어 쌓던 그 방정이 그랬고, 최근에만 해도 멀쩡한 제나라 말과 글은 제쳐두고 영어를 잘하는 나라 국민들이 잘 산다면서, 영어몰입교육을 합네, 오렌지가 어떻네 꼴값, 육갑을 떨었던 것도 영 마음에 걸린다.

불탄 현장에 어린이가 남겨놓고 갔다는 편지말처럼 남대문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불타는 남대문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우리는 너무도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관련기관들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댄 것이나 서로 책임 미루기 하는 것을 보면서, 남대문은 제 몸이 타는 아픔보다 기본조차 안 되어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남대문이 타고 난 얼마 뒤 대한민국 정부종합청사에서 난 불은, 이 나라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계에서 10위권 안팎의 경제대국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얼마나 허깨비이고 빈껍질이었던가.

우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이 큰 것이면 더욱 그럴수록, 그 사건이 주는 교훈과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남영신 이 남대문이 불에 탄 것을 두고, “그것은 분신이었다 / 자신을 태워 민족의 잘못을 일깨우려는 / 숭례문의 성스러운 / 자기희생이었다”고 큰 소리로 외친 바 있다. 불자(佛子)들 역시 그것은 남대문이 자기 몸을 태워 한국에 바치는 소신공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대문이 자기 몸을 태워 일깨우려 한 ‘우리 민족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또 남대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교훈과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건물 복원보다 시급한 정신의 복원

언제부터인가 남대문은 빌딩의 숲속에 둘러싸인 채, 초라하게 위축되어 박제된 모습으로 갓길에 유폐되어 외롭게 저 혼자 서 있었다. 옛날의 위엄을 잃은 지 오래요, 대문으로서의 역할이 멈추어진 것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일이다. 남의 것에 빼앗기고, 개발에 쫓기고, 돈과 효율에 밀리고 밀려서 올 데까지 온 것이다. 2006년 3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이제 남대문을 시민들에게 돌려드린다”며 그럴듯하게 개방했지만, 그것은 안전이나 보호대책이며 하나도 수반되지 않은 개발행정의 전형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소외와 모멸을 받다가 끝내는 불에 태워지면서 남대문은 우리 민족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남의 것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더냐. 개발과 돈이 그렇게도 좋더냐! 정신 차려 대한민국아”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아직 대한민국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 200억원에 3년이면 복원할 수 있다는 논의가 그렇고,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의 예산보다 국민의 성금으로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한 말이 또한 그렇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빨리빨리’와 업적위주의 전시행정의 타성에 젖어있다는 반증이다. 건물자체의 복원보다 더 시급한 것이 정신의 복원이다. 건물의 복원이나 퍼포먼스가 급한 것이 아니다.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새 정부에, 불에 타면서 남대문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남대문이 불에 타면서 우리 민족에게 꼭 전하고 싶어 했던 속 깊은 말을, 감히 내 나름대로 추정하여 말한다면 ‘문화와 인문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빵이나 돈이나 경제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위에 문화가 있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문화란 우리네 삶 속에서 ‘여기는 더불어 인간답게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확인해내는 일이며, 남의 것에 대한 모방과 굴종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세계 속에 세우고 교류하며 확장하는 일이다.


문화와 인문의 가치를 갈망하는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인·의·예·지가 모두 다 무너지고 없어지는 마당에 숭례문으로 서서 마지막까지 외롭게 버티다가 스러지면서 남대문은 우리에게 제발 인간답게 살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성찰하고 고뇌하며 살아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존과 품위를 가지고 살라고 말했을 것이다.

남대문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었다.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게 지탱해주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힘이었던 것이다. 남대문에 대해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아직도 문화와 인문의 가치에 대해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분명 희망이 있다. 남대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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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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