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 · George Bernard Shaw, 1856 - 1950.11.2.
미녀와 추남 · 모욕을 웃음으로 갚아줄 수 있는 자신감
“당신의 머리와 내 신체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굉장하지 않을까요?”
“거꾸로 내 육체와 당신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 보셨나요?”
‘맨발의 여신’ 이사도라 덩컨 (Isadora Duncan)의 편지에 대한 버나드 쇼의 답신, 다소 매정하게도 느껴집니다.
여성이 구애를 하기 어려웠을 때였고, ‘맨발의 이사도라’의 머리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버나드 쇼는 이처럼 유머 넘치는 독설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노벨문학상과 아카데미 각본상을 함께 받은 유일한 작가인데
노벨상을 받으면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세계문학상을 생각해낸 건 참 말이 안돼”하고 내뱉었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는 “남자나 여자나 교양의 시금석은 싸울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있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싸움을 걸어와도 유머로써 대응했습니다.
쇼는 어느날 자신의 뮤지컬 공연 때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형편없는 공연을 중단하라”고 외치자, 웃으면서 공손하게 말합니다.
“손님의 비평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제 작품은 형편없습니다.”
그리고 관중을 둘러보며 “손님,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손님과 나, 두 사람이 저 많은 사람의 열렬한 박수와 찬사를 막을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관중의 폭소와 우레 같은 박수가 뒤이었고 그 청년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누군가의 모욕을 유머로써 대응하는 여유와 건강함, 많은 사람이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쇼는 우리나라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있던 1950년 오늘(11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의사에게 “당신은 마치 골동품처럼 내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다”고 투덜댔다고 하지요?
묘비명(墓碑銘)에는 다음과 같은 아무리 봐도 새뜻한, 유명한 문구를 새기도록 유언을 남기고 말입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의 명언들
○ 그대가 할 일은 그대가 찾아서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해야 할 일이 그대를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용서치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것도 용서 받지 못한다.
○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는 것은 미련한 말이다. 건전한 육체는 건전한 정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 민주주의는 부패한 소수가 정하던 것을 무능한 다수가 대체했다.
○ 비겁자가 되지 않고는 영웅이 될 수 없다.
○ 어버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해 이 직업의 적성검사를 한 적이 없다.
○ 지나치게 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 없이 진리를 말할 수 없다.
※ source :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446호 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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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댄서 이사도라 던컨 · Isadora Duncan, 1878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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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열정의 화신인 '이사도라 던컨'
그녀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무용의 터전을 마련해준 시대의 아이콘
이었으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기 보단 음악 자체를 추었다는 극찬을 들었다.
또한 그녀의 춤은 카리스마가 강하고 즉흥적이어서 그녀가 태어난
미국에선 빛을 보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더욱 센세이션을 일으킨 독특한 춤이었다.
그녀의 춤은 온기가 없는 스튜디오에서 숱한 낮과 밤을 보내며 터득한 그녀만의 영감의 표출이었으며
그녀는 힘의 원동력이 솟구쳐 나오는 분화구, 모든 움직임의 다양함 중에서 통일체를 찾아내었다고 스스로 표현한,
고난도 기술로 연마된 기계적인 움직임이 아닌, 살아 있는 영혼의 춤사위를 선 보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말해
그녀의 춤은 정신을 집중해 영혼의 귀로 음악을 들으며 느끼고 어떤 이론이 아닌 무의식적인 반응의 결집인 것이다.

그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이지만
그녀의 춤을 이해 못하는 미국인들을 피해 런던으로 옮겨갔고 런던의 상류층
들은 그녀의 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녀의 맨발과 흰색튜닉의 의상도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고 그들은 그저 그녀의 춤사위를 아름다움과 독창성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녀는 귀족 앞에서도 춤을 추었는데
특히나 에드워드 7세가 된 웨일즈 공의 추켜세움으로 그녀는 졸지에 런던 사교계의 유명 인물이 되었고 그녀의 춤은
파리에서도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 내며베를린, 부다페스트를 거쳐 발레의 본 고장인 러시아에서까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적인 성공 이면에는 그녀의 화려하고도 그 당시로는 이해받지 못한 사생활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불행하고 불평등한 결혼 생활을 목도하곤 결혼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굳혔고 마침내
결혼없이 사랑만으로 살아가기로 결정을 내리곤그렇게 실행했다.
그녀에겐 여러 명의 연인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배우, 무대감독, 재벌가, 시인 등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얻었지만 그녀의 불행하고도 극적인 삶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가 공연을 하는 동안 그녀의 두 자녀는 사고로 낭떠러지에서 강물로
곤두박질쳤고 그렇게 자식을 잃게 된 그녀는 그 후로도 미친 듯이 춤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는 곳마다 성공을 이루어내었지만 그 중에서도 파리 에서의 공연 '마르세예즈'는 그녀에게 가장 큰 극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떠지고 독일군이 베르사이유를 포격할 때 그녀는 이 공연을 하였는데
붉은 빛 튜닉을 입고 절정의 순간에 "시민들이여... 무기를!" 하고 외치자 관객들이 울면서 떨쳐 일어나 열광적으로 앙코를 외친 것이다.
그녀는 윗도리를 찢어서 한쪽 젖가슴을 드러냈고 그녀의 자유정신을 보여주었다.


실질적인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녀도 한번 결혼 서명은 한 적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과였다.
그녀는 그 결혼이 "자유가 전제된 결혼이었다" 고 말하며 그와 함께 고국을 찾았지만 신문과 보수적인 관객들에게
시달렸으며 결국은 시민권까지 박탈당하고 쓸쓸히 모스코바로 돌아가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그녀의 남편
에세닌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아내에게만 미치는 걸 질투하며 마침내는 아내를 때리고 배반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자살로 마감했다. 그는 피로 시를 써 놓고 손목을 긋고 목을 매었다.
'안녕, 나의 친구여 안녕. 당신은 여전히 내 가슴 속에 사랑스런 사람으로 남아 있소.'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일생만큼이나 극적인데 사실 이사도라 던컨의 죽음에 관한 얘기에서다.
붉은 숄을 목에 감고 '바이바이 블랙버드'라는 노래를 들으며 차에 올라타 "안녕, 나는 영광을 위해 떠나!" 란
말과 함께 차가 출발하자마자 숄이 차바퀴에 끼여 목이 부러져 죽은 그녀.
그녀는 나이가 들며 미신으로 마음이 피폐해졌고 검은 새가 죽음의 전조라고 늘 생각했다던데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미래를 예견한 듯 그런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걸까? 그녀가 죽을 때 전축에선 이런 노래가
울렸다고 한다. '내 모든 걱정과 비애를 끝내 주오. 이곳에서 나는 낮게 노래를 부른다네... 검은 새여, 안녕 안녕.'
끝으로 그녀의 춤을 극찬한 말들을 모았다.
"러시아 고전 발레에 치유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 러시아 현대 발레의 개척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성스럽고 신과 같다." - 베를린
"이사도라 던컨의 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삶 자체보다 더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숙명 같은 것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풍부한 '표현'이다."
- 프랑스 화가 외젠 카리에르
"재능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천재라고 불러야 할 그 능력은
자연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 틀림없다." - 조각가 로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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