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연서 (戀書)
정진규 (1939~ )
사랑이여 그렇지 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臨界速度)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사랑에 이끌리는 순간은 전광석화(電光石火)보다도 빠른 찰나다.
허공을 날아가 상대에게 꽂히는 그 마음의 경이를 확인시키느라 시인은
다짐하듯 ‘않았던가’고 되풀이해 반문한다.
사랑에의 경사(傾斜), 그 몰입이야말로 텅 빈 세계를 아름다운 충만(充滿)으로 채운다.
이 시인은 또 다른 시, ‘연서(戀書)’에서 사랑은 “타지 않은 글자”라고 말한다.
재가 되기 직전 까만 종이 위로 몸을 떨며 떠오르는 하얀 글자.
스러질 수 없는 최후의 떨림이 지극한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마음 앞에서 언제나 안타까운 것이다.
- 김명인·시인·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이별 2
정진규 (1939 ~ )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뻗어 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 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제 몸이 허공이 되지는 않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고 허공과 제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거기 있었다 서러워 말자
시인 · 정진규
1939 경기도 안성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60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서정>이 당선 등단
1980 한국시인협회상, 1985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2003년 고려대, 순천향대 강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현재 시 전문지 월간 『현대시학』주간
시집 : <마른 수수깡의 불화(不和) 1966> <유한(有限)의 빗장 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 1979>
<비어있음 의 충만을 위하여 1983> <연필로 쓰기 1986>
<뼈에 대하여 1986> <옹이에 대하여 1989>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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