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 Poet & Profile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I hate flowers-I paint them because they're cheaper than models and they don't move!
나는 꽃이 정말 싫다 Georgia O'Keeffe
홀린 사람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 분의 슬픔이었고
이 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 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 때 누군가 그 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 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 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 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 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沙江里(사강리)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좋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가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그것봐' '그것봐'
황토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눈[雪]이 꽂혔다.
겨울. 눈[雪]. 나무. 숲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假面(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向(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窓(창)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淸潔(청결)한 죽음을 確認(확인)할 때까지
나는 不在(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거리)를 두고
그래, 心臟(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完璧(완벽)한 自然(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後(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기형도(奇亨度, 1960년 2월 16일 ~ 1989년 3월 7일)는
옹진군 연평도에서 공무원인 부친의 3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한 것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증으로 알려져 있다. 만 스물 아홉의 나이. 요절이었다.
같은 해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으며, 유고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현재
경기도 안성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