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 - Poet & Profile
수선화, 그 환한 자리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날랜 사랑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그리운 죄
산 아래 사는 내가
산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 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화음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 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성숙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고재종(高在鍾) 시인은 1957년 담양 출생으로 1984년 '실천문학'에 작품 ’동구밖 집 열 두 식구’ 등을 발표하며 등단,
작품집 '새벽들',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문장' 등과 산문집 '쌀밥의 힘'과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 다수를 펴냈다.
시와시학상을 비롯해 젊은 시인상과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은 바 있다. 계간 '문학들' 주간 등을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