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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같은…〉 · 마종기
2009.05.22 02:09
호박같은 마종기 한평생을 이렇게 살기 위해 내가 여기에 집을 짓고 가 지를 친 것이었나. 호박은 한여름 잎을 키우고 꽃을 피 우려고 휴가도 못 가고 말았지만, 작은 애호박이 몇 개 생기고부터는 힘든 주름살도 보이기 시작했지. 잎들은 해종일 엽록소를 깔아놓고 햇볕을 받아 영양의 유기물 을 만들고, 뿌리는 어깨가 휘도록 물을 길어올리고 무기 물을 사들여 애호박을 먹였지. 내 새끼를 위하여. 호박 속의 내 씨를 키우기 위하여. 내가 다시 그 안에서 살아 나기 위하여. 그래? 호박이 점점 커가면서는 더 많은 영양과 돈과 정성이 필요했지. 내 새끼를 잘 먹이고 남보다 뛰어나게 키우려 다가 뿌리는 힘이 삭아져 땅에서 버림받고, 호박 잎도 허리 굽게 일만 하다가 치매에 걸려서 헛소리를 뱉어내 는 가을, 말라 죽어가는 호박 뿌리와 줄기와 잎은 탐스 럽게 자라는 몇 개의 자식을 보면서 호박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숨을 거두었지. 내가 저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고, 저 호박이 내 생애의 다른 모습이라고, 다음 우주의 내 영광이라고, 그래? 호박 같은 삶을 위해 내가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고 결심하지만, 착각이여, 숨길 수 없는 착각이여. 죽은 잎 과 뿌리의 호박씨가 다음 해에 큼직한 호박이 된다고 해 도 그 누가 우리에게서 자란 그 호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노랗거나 붉거나 싱겁거나 달거나 혹은 크고 작은 크기를 말한다면 몰라. 김씨나 이씨나 박씨 성을 가진 것이, 또는 어느 지방, 어느 문중 호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겠는가.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며칠 도 못 가서, 비실대며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호박 같은 내 생시의 궤도여. 당신이 호박이었듯이 당신이 힘들여 키운 자식도 호박 이고 남들이 키운 자식도 호박이다. 당신의 친구도, 친척 도, 어제 잠시 스쳐간 사람도 모두 호박이다. 어느 종갓집 외동호박 씨도 호박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어느 씨는 이유 없이 먹혀 없어지고 누구의 씨는 다행히 수십 년 호박을 만들지 몰라도, 호박 같은 날들을 호박같 이 푹석거리며 남의 호박이 내 호박과 똑같은 호박이라 는 것을 확실히 알 때까지, 그 아무 호박도 속속들이 다 를 것이 없다는 , 호박 같은 진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출처 :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