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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秋史 세한도 歲寒圖 · 귀양살이 역경이 추사체와 세한도를 낳았다
1786년 오늘(6월 3일) 우리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추사(秋史) 김정희'가 태어났습니다.
추사의 호는 완당(阮堂), 예당(禮堂), 노과(老果) 등 180가지가 넘습니다.
어른이 돼서 지은 이름, 즉 자(字)는 원춘(元春)이고요.
추사는 조선 후기의 지식인 신관호와 흥선 대원군
이하응, 소치 허련 등의 스승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 번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추사는 초정(楚亭) 박제가의 제자입니다.
초정은 추사가 6살 때 집 문에 입춘첩을 붙이는 것을 보고
“학예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추사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15살 때
초정(楚亭)을 사사(師事)합니다.
추사는 생원시에 일등합격하고 24세 되던 해에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들로부터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고증학(考證學)을 체험하고 돌아와 열렬한 전파자가 됩니다.
31세 때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금석학의 대가로서도 여러 업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55세 때 당파 싸움에 휘말려 아무런 죄도 없이 제주도로 유배를 갑니다.
(헌종 6년(1840)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와 관련해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된다.)
윤상도라는 선비가 10년 전에 탐관오리를 고발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아 죽었는데,
이 사건에 선친이 연루됐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귀양을 가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한창 잘 나가던 관료였지만 세도 가문의 세력 싸움에 희생된 것이죠.
추사는 귀양길에 전남 해남의 대둔사(대흥사)를 들러 평생의 벗 초의선사를 만납니다.
추사는 그때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붙여놓다니…”
하고 혀를 차면서 현판을 떼게 한 뒤 자신이 글씨를 써줍니다.
그러나 8년 만에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대둔사에 들렀을 때에는
“내가 잘못 봤다. 그 현판을 다시 붙여놓게”라고 했습니다.
이광사(李匡師)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로 중국에서
벗어난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한 사람이었습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생활을 하면서 타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글씨를 쓰고 또 쓰면서
새로운 안목이 생겼고 동국진체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눈이 생긴 것입니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두 번째 부인 예안 이 씨를 잃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습니다.
추사의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귀양생활 중에 나옵니다.
추사는 사랑하는 제자 역관 이상적 (李尙迪, 1804-1865)에게 이 그림을 그려주었고
제자는 중국에 가서 명사 16명에게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받아오지요.
가끔씩 힘 들 때에 세한도의 글귀를 되새겨보십시오. 그 의미를.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
글: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401호 (2009-06-03일자)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아주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즉, 시류나 이익만을 쫓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켜나가는 이상적인 선비정신을 의미한다.
세한도(歲寒圖 · '추운 시절의 그림')는 소나무 두 그루, 잣나무 두 그루와
초가집으로 구성된 담백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범접하기 어려운 듯한 존재감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겨울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곧 무너져버릴 듯한 허름한 집 한 채,
좌우로 잣나무와 소나무 네그루가 서있고 나머지는 온통 여백뿐. 싱겁고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문인화.
자신을 잊지 않고 먼 곳에서 책을 보내주는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
(1804∼1865)의 정성에 감격, 그에게 그려보낸 것이다.
그림에 담긴 추사의 꼿꼿하고 엄숙한 정신이야 자주 거론됐지만
구도나 기법 등 형식에 관한 분석은 별로 없다. 하지만 세한도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탁월함을 자랑하는 명작이다.
오주석 한신대강사 (한국회화사)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세한도는 두 그루씩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기준으로 세개의 여백으로 나뉜다.
맨 오른쪽 첫번째 여백이 제일 넓고 가운데에서 좀 줄어들어 마지막에 가장 좁아진다.
첫번째 여백은 너무 넓다보니 휑한 느낌을 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 추사체로 「세한도」란 제목을 써넣어 휑함을 없앴고
그 옆에 세로로 낙관을 배치, 공간을 둘로 나누는 절묘함을 보였다.
세한도는 엉성해보이지만 실은 완벽한 삼각형구도다.
그림 오른쪽 아래구석과 집옆 늙은 소나무 가지를 선으로 잇고
그곳에서 그림 왼쪽 아래구석으로 선을 그리면 바로 삼각형.
오씨는 『불세출의 서예가다운 놀라운 구성력에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보고 또 보아도 세한도가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한다.
추사의 기개를 표현한 그림내용 역시 놀랍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텅 빈 느낌이다.
이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홀로 버려진 늙은 추사의 심정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역경을 견뎌내는 굳은 의지가 들어있어 한층 진가를 높여준다.
허름한 집이지만 붓의 선은 침착 단정하여 초라함 연민 따위가 들어설 틈이 없다.
그림엔 또 유배당한 옛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와 그 제자를 격려하는 스승의 따스한 마음이 어려 있다.
오씨는 『그림 오른쪽 소나무 두 그루 중 왼쪽의 곧고 젊은 나무가 없었더라면 추사의 집은 무너져 버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윤곽만 겨우 있는 추사의 집을 받쳐주는 튼튼한 나무, 그게 바로 추사의 제자다.
집 왼쪽의 싱싱한 잣나무 두 그루도 마찬가지.
수직상승하는 싱싱한 나무는 고독을 이겨내는 의지이자 제자를 통해
이 땅의 내일을 밝히려는 추사의 간절한 희망이다.
당대 최고의 걸작 세한도. 견고한 그림이지만
아래 한구석엔 추사의 애틋함이 숨겨진 네 글자의 붉은 도장이 찍혀있어 보는 이를 가슴 저미게 한다.
바로 「장무상망(長毋相忘 ·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
출처 : 1997/12/16일 동아일보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너무 고마워 세한도를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센티에 가로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않은 크기지만 여러사람의 발문
(그림을 보고 느낀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글)이 붙어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미터에 이른다(두루마리식)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
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것이 전부이다.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 짜서 마른 붓질로 까실 까실한 느낌이드는 갈필을 많이 써서 황량한 느낌과 함께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외롭고 초라한 유배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고고한 문기를 강렬하게 발산하여 김정희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도도 삼각구도를 잡아 단순한 작품속에서도 안정성을 이루고 필력있는 필치로 글씨하나,낙관한점 찍는것에 소홀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굳은 의지로 이겨나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받는 이상적은 이듬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읊으며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 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9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쯔까를 여러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기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한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 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844년작 작품크기:23.7*109.0cm
소장자:손창근
세한도를 그리며
(추사가 상적에게 보낸 편지)
오늘도 시간이 내 처소를
늙은 개 마냥 쩔뚝이며 느리게 지나간다네
낮에는 구름에 걸린 소나무를 쳐다 보았다네
문득 손끝에 잡히는 수염이 하도 길어
허름한 종이를 깔고
녹슨 가위를 숫돌에 갈아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다네
종이 위로 내 꿈이 솔잎처럼 쏟아져 내렸다네
내 남루한 꿈으로 노송 한 그루 그렸다네
상적 잘 지내시는가
자네가 보내준 책 잘 읽고 있다네
북경에서 어렵사리 구한 책을 보니
자네의 따뜻한 마음씨가
부드럽고 향긋한 먹내처럼
내 가슴에 파고 든다네
오늘은 바다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네
수많은 손과 발로 게처럼 부지런히 몰려드는 파도는
나에겐 형벌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네
이제는 너무 들추어 낡아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써본다네
눈물 젖은 환한 한양의 밤을 떠올려 본다네
자네도 제주 이 곳에 와보면
와서 눈이 내리는 겨울바다를 보면
바다와 권력이 닮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육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저렇듯 끊임없이 몰려들어 스스로를 부셔져 내리는 파도를 보면
조정 신하들이 쥐새끼 같은 낯으로 붉고 푸르게 차려입고
왕궁으로 몰려들어 자손만세 영화를 꿈꾸는
그 권력의 허망함을 생각하게 된다네
그래서 제주의 바람에는 꿈의 입자들이 묻어있다네
제주의 바람은 증폭되는 야망의 전조가 묻어있다네
아직도 내가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증거라네
오늘은 제주의 젊은 유생들과
실학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네
나라 안은 천주교 문제로 골치를 썩는다지만
아직 이곳은 조용하다네
젊은이들과 학문을 논하고
나는 바닷가 에 와 앉아있다네
이럴 때면 난 바다 속으로 난 사람의 길을 생각한다네
내 유배의 꿈은 깊고 깊어
바다에도 길을 만들 것 같네
내 꿈이 엄청나게 거대해져 천마가 되어
바다를 등에 업고
내 마음처럼 설레 이는 이 섬을
한양에 내려놓고 싶다네
바다에 눈발이 녹아드는
이런 날 그대와 술 한잔 기울이며
우리 바다가 되어봄은 어떤가
오늘 저녁은 자네의 곧은 마음을 떠올리며
파도 소리에 허리가 휜 노송이나 한 그루 그려보려 한다네
내 안의 아직은 혼탁한 피로 말일세
옹이마다 바다의 상처가 엉겨붙어 있다네
유배의 아픈 꿈이 담겨 있다네
내 처소에서 하룻밤을 지새보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발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혀가 되고 싶어진다네
절대 고독의 품안에 안기면
눈과 귀가 꽃잎처럼 열려
짐승들과 바람과 바다의 언어를 알아듣게 된다네
오늘처럼 내 마음에 태풍이 몰아치는 밤이면
바다가 네게 와서 나대신 울어주기도 한다네
나는 소나무 안의 바다를 그리며
그 바다 안에 햇살처럼 번진
완벽한 조화의 힘을 찾아 순례자처럼 떠돈다네
한양의 젖은 꿈들이 내 속눈썹을 적시며 밀려오고 있으이
내가 그린 늙은 소나무들이 칼처럼 단단한
내 젊음의 정신을 안고
그대에게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며 떠나간다네
나도 한 조각마음으로 그대에게 흘러가고 싶다네
노송 하나 다시 정갈하게 그려본다네
사람은 사람 곁을 떠나서야
온기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인가 보네
이 곳은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곳
나의 처소에는 섬사람 몇이
산짐승처럼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방문 앞에 말린 생선 두어 마리와
삶은 감자 바구니 놓아두곤 사라진다네
그것들을 달밤에 책장을 넘기며 먹다보면
목에 온기가 가시처럼 걸려 눈물이 흐르곤 한다네
따스한 사람의 온기에
내 몸은 아프게 달아올라 황금빛으로 빛나기도 한다네
밤마다 나는 나의 꿈을 놓지 못하여
나는 내 마음에 가시를 키운다네
내 정신이 아프다네
안사람에게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아래 거름되라고 묻어주었소
동백이 불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내 마음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소
문을 열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소
바다가 마당으로 몰려들어 나를 위로하려 하오
섬에는 섬의 노래가 있으오
내일은 잘 휘어진 노송 한 그루 만나러
가난한 산책을 오래도록 즐기려 하오
바람이 차오
건강 조심하오
신지도 유배된 원교 圓嶠 이광사 李匡師 와 대흥사 대웅보전…숨겨진 이야기
추사 김정희의 그늘에 가려 잊혀진 인물이 됐고,
한 시절에는 그의 글씨마저 폄하(貶下)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원교 이광사를 이해하려면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상기하면 이해가 다가 올 것이다.
당시 그가 이곳 완도 신지도에 유배됐을 때 쓴 현판이 바로 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영조조 그는 큰 아버지 이진유의 나주벽서사건(羅州僻書事件)에 연류 돼 이 사건의 연좌로 신지도 유배시절 쓴 원교서결(圓嶠書訣) 또한 후세 사람들이 추앙하는 작품이다.
아쉽게도 이광사가 신지도에 머문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어느 유배사 못지않게 널려있다.
그가 귀양온 몸으로 생을 마감한 곳도 이곳 전라도 완도 신지도다.
화강암의 골기(骨氣)까지 느끼게 하는 그의 글씨는 알려진 대로 향색(鄕色) 짙은 동국진체(東國眞體), 즉 민족적 색채가 가미되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곳에 유배된 시절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보자.
추사 나이 54세. 그는 기고만장한 삶을 살면서 당시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외교사절로 북경으로 떠나려 할 때 정변이 일어나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다행이 친한 벗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절해의 고도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면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전주와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어 초의를 만난다.
이 때 대흥사 현판에 걸려있던 원교의 대웅보전(大雄寶殿)글씨를 보고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자네는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에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쳐 댄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세월이 흘러 추사는 귀양살이 7년3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초의와 해후하게 된다.
이 때 추사는 초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야 초의.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는가 ?
내 글씨를 떼고 다시 달아주게. 그 때는 내가 잘못 봤어! 이 말은 곧 추사 인생의 반전이었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그는 외로운 귀양길에서 채득한 것이었다.
이같은 사연을 안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현재도 대흥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상가이자 당대 명필이었던 원교 이광사가 이곳 전라도 서남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그의 서체는 서예 명망가들로부터 연이어 전수되면서 예술로 승화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작품은 강진 백련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불 수 있지만 기록이 미진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원교에 대한 우리의 현 시대를 비교해본다면 이같은 역사의 미진함이
오히려 원교에 대한 감칠 맛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본관은 전주로 1705년에 태어나 1755년 영조 원년 회령으로 유배되었으나
학문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다시 진도로 옮겨 여기서 생을 마감한다.
정재두 에게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 에게 전수했고,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에게 글씨를 배워 진(眞) 초(草) 전(篆) 예(隸) 모두 능했으며,
원교체 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 땅에 남기면서 조선의 서예 중흥에 한 획을 그었다.
저서로는 동국악부, 원교집전, 영의정 이경석표 등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