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w with my own eyes the Sibyl at Cumae hanging in a cage, and
when the boys said to her 'Sibyl, what do you want?'
that one replied 'I want to die'. --Steve
보다 훌륭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 1922, T.S 엘리어트
[Eliot's poem is prefaced by a quote from the 1st century A. D.
Satyricon(사티리콘=모험담소설) of Petronius] in Greek and Latin.
▲ T.S. Eliot, one Sunday afternoon in 1923 photographedby Lady Ottoline Morrell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 from 'The Waste Land' by T.S. Eliot
I.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忘却)눈으로 대지(大地)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가냘픈 생명(生命)을 키웠다.
여름은 갑자기 소나기를 몰고 슈타른베르가제 湖上 (Starnbergersee)을 건너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Hofgarten)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가량 지껄였다.
내가 러시아 사람이라고요.
천만에 난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난 순수한 독일人인데요.
어렸을 때, 사촌 太公집(arch-duke's)에 머물렀었는데
사촌은 나를 썰매에 태워 데리고 나간 일이 있었죠.
난 무서웠어요, 마리 마리(Marie), 꼭 붙들어 하고 그는 말했어요.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山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지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南쪽으로 갑니다.
이 엉켜붙는 뿌리들은 무엇인가?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
人子여(Son of man),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의 무더기뿐.
그 곳엔 해가 내리치고, 죽은 나무 밑엔 쉴 그늘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틈엔 물소리 하나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내 너에게 보여주마.
아침에 네 뒤를 성큼성큼 따르던 너의 그림자도 아니고,
저녁때에 네 앞에 솟아서 너를 맞이하는 네 그림자와도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 줌의 흙먼지 속에서 공포(恐怖)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부는데
아일랜드의 우리님아
그대 어디서 날 기다려 머뭇거리뇨?>
'일년 전 그날 밤 당신은 나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이 꽃을 한아름 안고 이슬방울 머리에 맺힌채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에서
나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이 안나왔고 눈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산 것도 아니었고, 죽은 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몰랐었다.
다만 빛의 한복판, 그 정적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었다.
<바다는 황량하고 임은 없어 쓸쓸하네.>
소소스트리스 부인(Sosostris)은 아주 유명한 千里眼 (clairvoyance),
독감에 걸려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영특한 트럼프 카드 한벌을 가지고 占을 친다는 女人.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이것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자, 이것이 당신 卦요. 익사한 페니키아 水夫(drowned Phoenician Sailor)군요.
(보세요! 前날의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이건 벨라도나(Belladonna), 岩山의 婦人, 수상한 여인이에요.
이건 세갈레 지팡이를 짚은 사나이, 이건 차바퀴
이건 애꾸눈 상인
그리고 아무것도 안 그린 이 공백의 패는
이 상인이 짊어지고 있는 그 무엇인데,
내겐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교살당한 사내(Hanged Man)의 패는 보이지 않는군요.
물에 빠져 죽는 걸 조심하세요.
아아, 떼를 지어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군요.
또 오세요. 에퀴톤씨 부인(Mrs. Equitone)을 만나시거든
천궁도(horoscope)를 직접 갖고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요새는 조심해야 하니까요.
空虛의 도시(Unreal City),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속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교(London Bridge) 위로 흘러갔다. 저렇게 많이, 나는
죽음이 그처럼 많은 사람을 멸망시켰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자기 발치만 내려보면서
언덕을 넘어 킹 윌리엄 가(King William Street)를 내려가
聖메어리 울노스(Saint Mary Woolnoth) 성당이 아홉時 最後의 一擊의 꺼져가는 鐘소리로서
예배시간를 알리는 그곳으로 群衆은 흘러갔다.
거기에서 나는 낯익은 한사람을 보았다.
'스테슨!(Stetson!) 하고 소리질러 그를 세웠다.
자네 밀라에(Mylae) 해전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엔 꽃이 필까?
혹시 때아닌 서리가 묘상(苗床)을 망쳤나?
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hypocrite lecteur)! 나의 同胞여! 나의 형제여!'
The Waste Land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1922).
I. THE BURIAL OF THE DEAD
(주) ☞ 로마신화에서 Cumaean sibyl(巫女·무당)은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다.
특히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의 쿠마의 무녀는 유명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 만큼 (황무지 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장수를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음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들어 조롱(鳥籠)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나은 예술가 (il maglor fabbro)"는 단테가 신곡 <연옥편>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Arnaut Daniel을 찬양한 문구이다.
엘리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혼란한 상태에 있던 <황무지>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절반의 길이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참고) ☞ 마지막 부분은 보드레르의 <惡의 꽃> 서시 "독자에게"의 마지막 행을 엘리어트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보들레르처럼 엘리어트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시행이다.
※ ‘엘리엇’ 미국 태생 영국의 시인 · 극작가 · 문학비평가.
'황무지'는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不在),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再生)이 거부된 죽음에 대해 쓴 시이다.
엘리엇은 이 시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해 표현하고 있다.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되고 있다. 진정한 재생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4월은 재생 (reborn)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재생을 요구함으로써 또한 잔인하다.
첫 행의 암시적 시구에 제시되듯이, 삶이 곧 죽음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작가는 구원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에서 어떤 문명의 싹이 트고 꽃을 피울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거의 전통을 지켜 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전통적 정신의 유산을 발견해 내려는 관찰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의 내용을 통해 보면 작가는 고대의 성배 전설(聖杯傳說)과 웨스턴 여사, 프레이저가 연구한 생명의 원리와 그 부활에 관한 원형 신화(原型神話)를 참조하였다.
결국 이 시는 '성배 전설'이라는 원형 상징을 이용해 20세기 인류 문명의 황폐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접목으로 구원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황무지(荒蕪地)의 의미는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세계와 작자 자신의 황폐한 사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황무지란 전쟁의 황폐와 유혈의 황무지라기보다는 서구인의 정신적 불모 상태,
즉 어떤 소생의 믿음도 인간의 일상생활에 중요함과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성(性)이 2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갓 쾌락을 위한 것이 되었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는 비극적 상태를 나타낸다.
성배(聖杯) 전설 - 늙고 병든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 재앙이 일어난다.
왕은 재앙을 물리칠 지혜롭고 힘센 젊은이를 찾고 있다.
성배 전설은 성배(聖杯)를 얻은 자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이다.
마침내 성배를 가지고 한 젊은이가 나타나 재앙 (전염병 혹은 외부의 침입)을 물리치고는,
공주와 결혼하여 새나라를 만든다. 엘리엇은 현대 사회의 재앙을 '황무지'에 비유한 다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T. S. 엘리어트는 ‘문학의 독재자’란 칭호를 얻을 만큼 20세기 전 반의 영미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이나 평론엔 시대정신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하버드와 소르본,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엘리어트가 런던에 정착한 뒤 최초로 발표한 시는 〈프루프록의 연가〉다.
그의 초기 시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의식과 너저분한 도시 풍경이 의식에 미치는 우울함을 반어적 표현으로 담아냈다.
〈황무지〉는 이런 현대생활의 고독과 황폐함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황무지〉가 현대생활의 묘사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서구문명에 대한 진단서이기도 하다.
스펜더의 지적대로 〈황무지〉는 현대 도시의 병적 징후를 통해 프로스트의 〈소돔과 고모라〉와 헤르만 브록흐의 〈몽유병자〉,
슈펭글러의 〈서구문명의 몰락〉처럼 문명의 종말과 악의 창궐을 냉철히 조명하고 있다.
〈황무지〉는 현대성에 대치되는 비판적 관점을 제공할 의도로 인유법을 쓰고 있다.
434행으로 이뤄진 〈황무지〉시엔 35명의 작가에게서 차용 내지 개작한 내용이 담겼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이 구절은 초서의 '켄터버리의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의 '희망적인 4월'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의미는 시인의 의식이 다름아닌 코메의 무녀나,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어부왕의 심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생명의 부활(reborn)을 약속받은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죽은 목숨만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가사(假死) 상태를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는 모든 것을 일깨우는 사월이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저주받은 축복'이기도 하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 하므로 '축복'의 계절이지만,
작고 연약한 씨앗이 겨울의 단단한 땅을 밟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저주'이기도 하다.
※ 봄비로 - 뒤흔든다 : 4월이 되어 봄비에 잠든 생명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것을 본 시인에게는
좀더 행복했던,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 슈타른베르가제(Starnbergersee) : 뮌헨 근처에 있는 호수 이름.
※ 이 엉켜 붙은 - 자란단 말인가 : 여기에서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듯이
시인의 의식은 일변하여 현대의 황무지로 초점이 바뀐다.
※ 인간의 아들이여, / 너희들은 말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어,
: 구약 성서의 "에스겔" 2장 1절을 인용하고 있다.
※ 깨진 영상의 무더기만을 아느니라. : "에스겔" 6장 6절,
'너의 영상(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를 인용하고 있다.
※ 거기에 태양이 - 물소리 하나 없다 : 어느 황야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사상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일 뿐,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다.
※ 이 붉은 바위 밑에만 그늘이 있을 뿐, : 구약의 "이사야" 32장 2절,
'(외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은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은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를 인용한 표현으로 바위 그늘은 예수를 암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그 곳이 인간의 유일한 피난처라고 묘사하고 있다.
※ 한 줌 - 보여 주마 : 여기에 이르러 시인의 명상은 사랑의 장면으로 옮겨진다.
시인은 예언자의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인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이 지상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상의 생명은 결국 실체없는 허망한 것이어서, 아침 저녁 우리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 바람은 어디서 머뭇거리느뇨 : 이 4 행의 인용은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트' 중
아일랜드의 처녀 이졸트를 콘월에게 데리고 오는 선상에서 젊은 수부가 행복에 겨워 부르는 노래의 일부분이다.
트리스탄의 이야기는 아더왕의 전설 중의 한 이야기다.
※ 바다는 황량한 - 님은 없네. : 이 구절 역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트"
3막 24절을 인용한 것으로 제 3막에서 트리스탄이 이졸트를 기다리며 임종하는 마당에 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양치기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