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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의 유력 수상 후보 로 거론되면서 그의 대표작인 '만인보' (萬人譜)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 고은 「만인보」 서시 中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범 위반으로 육군 교도소에 갇힌채 구상을 시작한 만인보는 만 30년인 2010년에 완간됐다.
첫 발매는 지난 1986년. 총 작품수만해도 4001편이다.
세계 시단에서도 '오늘날의 문학에서 가장 비범한 기획'이라 평가받는 만인보는 제목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고은 시인도 2009년 신간을 탈고한 이후 약 8개월에 걸쳐, 앞서 출간된 만인보의 역사적 사실관계와
인명 착오를 바로잡고 4천편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손보는 등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
'사람들에 대한 노래' 가 큰 강을 이뤄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파도소리라는 평을 받는
이 작품은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 라 불러도 손색없다.
시인이 "내 어린 시절의 기초 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고 밝힌 초반부는
가난의 세월에도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은 정 많은 이웃이 등장해 마을의 역사를 일궈나간다.
7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 나온 중반부에서 시인은 70년대의 이야기를 주로
노래했는데 신경림, 백낙청 등 우리에게도 유명한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법정 스님 등 인덕으로 선망받던 인물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30권의 마지막 시 '그 석굴 소년' 에서 고은 시인은
"이 세상의 길고 긴 이야기 다함 없느니 /
오늘밤도 그대 따라가는 /
만인의 삶 이야기 삶과 죽음 이야기 그칠 줄 모르리 //
(…) 다할 줄 모르는 영겁의 돌책이여 돌노래여 돌이야기들이여"
라며 삶에 대해 노래한다.
( - 스포츠뉴스 김경주 기자 2010-10-07)
고은, 노벨상 수상 실패… “그래도 자랑스러워”
10월 7일 오후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수상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마정리 고은 시인 자택 주변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주민 민건옥(58.여)씨는 “올해 는 꼭 받았으면 했는데 안타깝지만,
몇 년째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는 것만 해도 어디냐” 며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몇 년째 노벨문학상 발표 때마다 고 시인 자택 앞을 지켰던 주민 양기철(51)씨는 “안타깝지만 내년
에도 기회가 있다” 면서 “선생님이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고 오늘 좋은 꿈 꾸시길 바란다” 고 마음을 전했다.
올해는 고 시인이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꼽히면서 그의 자택 앞에 100여명의 취재진이 몰리기도 했다.
고은시인 노벨상 8년째 고배 “우리 시 죽지 않았음 보일 것”
“내 이름이 거론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 출신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지난 10월 7일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밝힌 수상 소감이다.
실제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10월만 되면 유력한 수상 후보로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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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만인보> 완간 기자회견, 고은 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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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수상소감은 고은 시인에게도 해당 되는 말이다.
8년째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해는 특히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다.
국민들과 고 시인은 내년 가을을 또 기약하게 됐다. 고 시인은 노벨문학상 발표 후 한 측근에게
“한국에서 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는 보여주겠다” 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 시인은 한국 문학의 노벨문학상 도전사에서 가장 목표에 가까이 접근한 인물이다.
고 시인이 수상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다. 2005년과 올해는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올해의 경우 발표 당일 AP통신, 스웨덴 공영 SVT 방송에서 유력 후보로 지목하면서 수상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노벨문학상이 전세계 문학을 대상으로 하지만 해당 작가가 스웨덴에 소개되지 않았을 경우 한림원이 상당한 부담을 갖는다는 것이다.
바르가스 요사를 포함, 역대 수상자 107명 가운데 아시아권 수상국가는 인도 · 이스라엘 · 일본(2회) · 중국 · 터키 등 5개국에 불과할 만큼 서구 편중의 선정도 고쳐지지 않았다.
현재 고 시인은 해외 지명도에서 가장 앞서 있다. 그의 작품은 16개 언어권에
58종이 번역, 출판돼 있으며 이 중 스웨덴어 번역은 <고은시선> <만인보> 등 4종이다.
올해의 경우 96년 이후 수상자 가운데 시인이 없었고, 최근 6년간 수상자가 모두 유럽 출신이란 점에서
고 시인의 수상이 유력시됐다. 바르가스 요사는 남미 출신이지만 사실상 유럽 중심으로 활동해 왔고
소설가란 점에서 고 시인의 ‘패’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것 으로 보인다.
김주연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작의
우수성과 서구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보편성이 중요하다” 며
“한국 문학 번역을 주요 언어로 집중해 다양한 우수 작가들을 소개해 중장기적
으로 체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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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 고은
칸첸중가 혹은 에베레스트에는
사랑 따위 없소 필요없소
그 천년 빙벽에
그 천년 폭풍만 있어야 하오
팔천 미터 아래
나지막이
거기 어느 골짝에 사랑 있소
거기 오래 묵어
쉰내 나는 사랑 있소
물이 사랑에 주려
아래로만 흘러가고 있소
허나
저 아래 바다
거기에는 사랑 없소 전혀 필요없소
높지 말 것
넓지 말 것
사랑은 첫째 작고 시시할 것 바람벽에 홑적삼 걸릴 것
대자대비 아니오 박애 아니오 그저 사랑은 무명 맹목의 그 사랑이오

만인보 23 [그 골방] 고은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매양 벙어리로
드리워져 있는데
왁자지껄한 거리
지친 달구지
건달 야바위꾼들
이 장 저 장 장돌뱅이들
시끌벅적한 거리
한놈은 죽어라 도망가고
한놈은 쫓아가고
저놈 잡아라
저 도둑놈 잡아라
그런 소리 다 끝나는 뒷골목
거기
문득 둠벙 물속 같은 고요
오두막 메밀묵집
손님 서넛
주린 배에
방금 쑤어낸 김 모락모락나는 묵사발 안긴다
그러나 그 집 골방
거기
소경이 있어
메밀 맷돌을 돌리고 있다
하루 내내
뒤보는 일 말고
꽁보리밥 찬밥 한 그릇
다 늦은 점심 때 먹는 일 말고
내내
컴컴한 골방 메밀 맷돌 돌리고 있다.
잔인무도의
침묵
침묵
오직 그것
고은, 만인보 中 9편
봉태
나하고 초등학교 일이등 다투었지 부자집 아들이라 옷이 좋았지 항상 단추 다섯 빛났지 도시락에 삶은 달걀 환하게 들어 있었지 흰쌀밥에 보리 뿌려졌지 그러나 누구한테 손톱발톱만치도 뽐낸 적 없지ㅣ 너희 논 옆에 우리 논 하나 있다 너하고 나도 의좋게 지내자고 굳은 떡 주며 말했지 그런 봉태 수복 직후 아버지 죽은 뒤 동네사람에게 끌려가서 할미산 굴 속에서 죽었지 유엔군 흑인 총 맞아 죽었지 그 달밤에 그 캄캄한 굴 속에서 죽었지 봉태야 나는 너 하나 살려낼 수 없었다 네 열일곱 살은 내 열일곱 살이었는데
아베 교장
아베 쓰도무 교장 뚱그런 안경에 고초당초같이 매서운 사람입니다 구두 껍데기 오려낸 슬리퍼 딱딱 소리내어 복도를 걸어오면 각 교실마다 쥐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학년 때 수신시간에 장차 너희들 뭐가 될래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일본제국 육군 대장이 되겠습니다 해군대장이 되겠습니다 야마모또 이소로꾸 각하가 되겠습니다 간호부가 되겠습니다 비행기공장 직공이 되어 비행기 만들어 미영귀축을 이기겠습니다 할 때 아베 교장 나더러 대답해보라 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천황폐하가 되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청천벽력이 떨어졌습니다 너는 만세일계 천황폐하를 황공하옵게도 모독했다 네놈은 당장 퇴학이다 이 말에 나는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담임선생이 빌고 아버지가 새 옷 갈아입고 가서 빌고 빌어서 간신히 퇴학은 면한 대신 몇 달 동안 학교 실습지 썩은 보릿단 헤쳐 쓸 만한 보리 가려내는 벌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나는 썩은 냄새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땡볕 아래서나 빗속에서나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서 내가 혼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석 달 벌 마친 뒤 수신시간에 아베 교장은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대일본제국이 이겨 장차 너희들 반도인은 만주와 중국 가서 높고 높은 벼슬 한다고 말했습니다 B-29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빛 4발비행기가 왔습니다 교장은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것이 귀축이다 저것이 적이라고 겁도 없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베 교장의 어깨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큰소리가 적어지며 끝내는 혼자의 넋두리였습니다. 그 뒤 8.15가 왔습니다. 그는 울며 떠났습니다.
호박꽃
그동안 시인 33년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규정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것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반역이다라고 규정해왔다 몇 개의 미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 미학 속에 있지 않았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나는 잠들었다
아 내 지난날에 대한 공포여 나는 오늘부터 결코 아름다움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규정하다니 규정하다니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긴 장마 때문에 호박 넝쿨에 호박꽃이 피지 않았다 장마 뒤 너무나 늦게 호박꽃이 피어 그 안에 벌이 들어가 떨고 있고 그 밖에서 내가 떨고 있었다
아 삶으로 가득찬 호박꽃이여 아름다움이여
외할머니
소 눈 멀뚱멀뚱한 눈 외할머니 눈
나에게 가장 거룩한 사람은 외할머니이외다
햇풀 뜯다가 말고 서 있는 소
아 그 사람은 끝끝내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외다 이 세상 평화외다
죽어서 무덤도 없는
병옥이
두메 촌놈으로 태어나면 대여섯 살에 벌써 노는 놈 없다 산같이 쌓인 일에 아버지 따라 일꾼 되어야 한다 가을 오면 우렁 잡아오라는 어머니 말 듣고 논으로 달려가 드넓은 논바닥 우렁 뒤지는 한나절 좋다 참 좋다 그놈의 일구더기 떠나서 좋다 병옥이 우렁 잘 잡는 병옥이 양잿물 잘못 먹고 죽어버렸다 동네 아이들 병옥이 무덤 아무도 몰랐다 아이들 죽어야 무덤도 없다 제사도 없다 또 낳는다
선제리 아낙네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치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리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 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딸그마니네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 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다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차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앞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 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나다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세상에는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
재숙이
시암안집 처녀 재숙이 찰찰 넘치는 물동이 이고 가며 먼데 바라보기도 한다 첫가을 백리가 탁 트였구나 내년에는 우리 동네 떠날 재숙이 온통 부푼 재숙이 달 진 뒤의 어둠 같은 재숙이
김신묵
아흔여섯 살 김신묵은 내가 죽으면 박수치며 보내달라 하고 죽었다 장례식날 그의 관이 나갈 때 박수를 쳤다 그 누구도 박수치지 않는 자 없다 산에다 묻어버리고 내려올 때 그의 말이 들렸다 박수치며 내려가라고 그래서 하나둘 박수를 쳤다
동두천 의정부 사이의 길이 양키 없이 빛났다.
* 김신묵여사는 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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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V 등단 50년, 75세 사춘기 시인 고은
시인 고은, 만인보
▶ 고은 시인은?
고은 시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서 우연히 한하운의 시집을 주웠다. 나는 울었다. 나는 한하운이 되고 싶었다.
먼저 문둥병에 걸려야 했고, 그리고 문둥이의 시를 써야 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은 내 운명의 구호가 되고 말았다.”
1958년 등단한 이래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130여 권의 저서를 간행.
특히 1995년 호주에서 영문 시선집 <아침 이슬(Morning Dew) : 페이퍼 바크 출판사(Paper Bark Press)>이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고, 그 결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 초청되는 시드니작가축제(Sydney Writers' Festival)에 1996년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시드니작가축제에 참가한 고은 시인은 많은 청중들 앞에서 한국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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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역작!
25년의 집필, 전30권 총4,001편의
만인과 시대에 바치는 연작시편
만인보는 완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경이로운 향연이다. 이제 독자들이 즐길 일만 남았다. - 백낙청 문학평론가
시인이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김병익 문학평론가
만인보는 오늘날의 문학에서 가장 비범한 기획의 하나이다. 더할 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놀라운 작품들이다. 몇천개의 삶을 시 속에 새겨서 보여주는 에끄프라시스들이다. 고은은 아케론강을 열 번이나 승자로 건넜다 ㅡ 미셸 드기(Michel Deguy)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 고은(77)의 연작시편 만인보가 전30권으로 완간되었다.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구상한 지 만 30년 만에,
1986년 1?2?3권을 출간한 이래 25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 경이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총 작품수 4001편,
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은 5600여명에 이른다. 이번에 출간되는 것은 완간을 기념하여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양장합본하고 여기에 신간 27-30권을 더하여 전12권의 전집(연보·인터뷰·작품색인·인명색인 등을 담은 별책 1권 포함)으로 묶은 것이다.
시인은 지난여름 신간원고를 탈고한 이후 전집 출간에 맞추어 약 8개월에 걸쳐 역사적 사실관계나 인명 착오 등 기간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4천편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손을 보는 등 작가로서의 왕성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세계 시단에서도 ‘20세기 세계문학 최고의 기획’이라 평가받는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시인생활 30년 만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사람들에 관한 노래’가 대하(大河)를 이루어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파도소리에 우리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빠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발자끄에 빗대어 말하자면 가히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이를 만하다.
그 어떤 대하소설도 에 버금가는 성과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전집 1권(1-3권, 초판: 1986년 11월)과 2권(4-6권, 초판: 1988년 11월)은 시인이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 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고 밝힌 것처럼
예사롭지 않은 고향사람들의 이야기가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1권만 살펴봐도 코흘리개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깨우쳐준 「머슴 대길이」를 비롯하여
‘바그메댁, 수레기댁, 똥가래, 밭가래, 효조지 영감, 턱점백이, 찬밥네, 따옥이, 찐득이’ 등
그 이름부터가 눈에 띄는 동시에 탁월한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다.
‘쇠정지, 동고티, 갈메’ 등 이름도 정겨운 마을에는 굶주림의 고통과 대물림되는 가난의 세월에도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는 정 많은 이웃과 사람 사는 동네에는 꼭 한둘은 있게 마련인
밉살맞고 아기똥한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며 마을의 역사를 일구어나간다.
그리고 시인의 집에는 “삼년 원수도 술 주면 좋”다 하는 할아버지(18면)와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사뭇 꿈꾸는 사람”인 아버지(45면)와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에도 “곤한 몸 누일 데 없”는 어머니(35면)가 있다.
시인은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을 살가운 입담으로 불러내어 사랑방 화롯가에서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푸근함을 전해준다.
그 속에는 또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물씬 배어나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전집 3권(7-9권, 초판: 1989년 12월)에 이르러 시인은 비로소 고향의 산천을 벗어나
1950년대의 간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만나고 스쳐간 사람들을 불러내어 당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민초들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평생 남의 일 해주고/남의 마음 달래주고/제 그림자마저/남을 위해 있다가” 세상 떠난 신석공(8권)과 그 못지않게
“늘 기운 옷 입거나/해진 베등거리 걸치거나 하”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김목공(9권)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낮거리하기로 하늘 아래 좍하니 소문”난 얼금뱅이 진태묵(7권),
“잔칫집이나/초상집 가서/하루 삼시 세때 잘 먹고”도 꼭 “남은 음식 걷어가지고 일어”서는 뻔뻔이 강순달(9권)과 그의 마누라(9권) 등
시 속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비단 이름 석 자뿐인 ‘무지렁이 촌것들’
뿐만 아니라 “멋쟁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7권), ‘삼일천하’의 김옥균(7권), 광복 후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은 인천노조위원장 권평건(7권), “감격 없는 시대를/감격으로 마치고자” 했던
“애오라지 시인적인 시인” 임화(8권),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섰던 ‘백정’ 박성춘(8권),
“첫사랑이 공산주의였”던 “고독의 혁명” 빨치산 대장 이현상(9권),
“나라가 할 일/혼자의 엄두로 해내고” 사라져버린 고산자 김정호(9권) 등등 풀뿌리 사이사이 등장하는 역사 속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온전히 기억에 기댄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과 이야기를 엮어내는 능숙한 솜씨로 인하여 우리는 시공을 넘나들며 당대의 삶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에는 변함없이 이야기꾼으로서의 시인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입말이 한몫 거든다.
이후 7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에 나온 전집 4권(10-12권, 초판: 1996년 11월)과 5권(13-15권, 초판: 1997년 6월)은
주로 ‘70년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시대를 살아온 독자라면 이름만으로도 친숙한 인물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시인과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이다.
“하얀 머리칼/하얀 수염/하얀 두루마기/하얀 고무신”차림에 “어제도 오늘도/허위허위 쉬지 않는 말”뿐인
“뒷모습까지도 말”인 함석헌(10권), “작은 몸에 큰 염통”을 지닌 “7백만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10권),
“죽음으로 싸움을 이끌었”던 장준하(10권), 저 암울한 70년대에 “한국의 도처에/세계의 도처에” 있었던 김지하(10권),
“7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어린 사람”이었다가 “8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젊은 사람”이었던 문익환 목사(11권),
“한 걸음도 조심스러운 언론인”에서 “역사의 사람”으로 거듭난 송건호(11권), “누구이든 마음 편하게 해주며”
“어느 때나 곱게 웃으며 오는” 신경림(11권), “남에게 한가닥 감정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엄밀한” 백낙청(12권) 등
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수많은 인사들이 시인의 프리즘을 통해 새로운 면모로 드러난다.
여기에 더하여 시인은 동지쪽은 물론이거니와 반대쪽의 사람도 자신을 키워준 육친임을 고백하며
그들 또한 한 마당에 하나둘 불러들인다. “일본 육군의 모범 장교”였던 “성난 독사”
박정희(11권)를 비롯하여 “각하를 거스르는 자라면/몇만명쯤/아예 없애버”리면 그뿐이라는 차지철(10권),
“결코 어리석지 않은 배불뚝이” 김형욱(11권), “영리하기 짝이 없는 무능으로/만능을 누렸”던 정일권(13권),
“박정희교의 수제자” 이후락(13권)들을 불러내 그들의 망동을 준엄하게 되묻는다.
“개발이 악이 아니라 선이기를/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이라는 촌철살인으로 예언자적 일갈을 던진 이명박(15권)에 이르면 독자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한편 “고난이 필요한 시대 고난의 과녁이었”던 김대중(10권),
“한번도 분노를 떠뜨리지 않아도/가장 강했”던 김수환 추기경(10권),
“옷깃에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고 “방금 새옷으로 갈아입은 소녀”처럼 “오로지 깨끗해야” 했던 법정 스님(11권),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고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던 노무현(13권) 들을 만날 때면 최근에 고인이 된 그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가 죽어 한 시대가 열렸“던 전태일 열사(15권)를 비롯하여 민주화투쟁에 온몸을 불사르고
혹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열사들(15권 별편)의 이야기 앞에서는 저 끔찍했던 군사독재 시절로 빠져드는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다시 또 7년간의 공백 뒤에 달고 다섯 권이 동시에 출간된 전집 6권(16-18권)과 7권(19-20권, 초판: 2004년 1월)은 식민지시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인간 군상을 다룬다.
시인은 한국전쟁 시기 가공할 폭력과 폐허의 시대를 살아낸 뭇사람들의 삶을 통해
고통스러운 역사의 의미를 되묻고 그에 짓밟힌 온갖 형상의 인간들을 보듬어 안는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 이형근(16권), 한나라의 국방장관이기 이전에
“늙은 독재자에게 필요한 교활한 환관”일 뿐인 신성모(16권),
“가장 인간다운 장군”이자 “대한민국 육군의 명예” 이종찬(16권), “나라의 불행”과
“나라의 모순을 잘 쓰고 남”긴 이승만(18권), 그 “이승만의 집사” 이기붕(19권),
“시인 일류/비평가 일류”이나 “혁명가는 차라리 삼류”가 좋았을 임화(20권), “섬세한 독신 여인”이었다가
극한 상황에서 “잔인한 독부”가 되어버린 노천명(20권), “피난가려고 짐을 꾸리는 판”에 “초라한 방문객 맞아”
“가야금산조 하나를 다 들려주”고 “남은 쌀 닷되와/먹다 남은 밥 싸서 주”던 김소희(17권) 들과 같이
세상에 이름 석자를 남긴 인물 외에도 “지프차 미군 두 놈에게/강간당”한 뒤
“감싸주는 곳이 아니라/손가락질하는” 고향을 떠나 ‘에레나’가 되어버린 순자(16권)와 같은
무명의 갑남을녀들이 보복과 복수로 점철된 야만의 상황에서 짐승으로 취급받고 “폐허에서 살아남은” 아기가
“학살당한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16권) 끔찍한 장면들이 절망의 빛이 어린 시인의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시인은 이로써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고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김병익, 20권 ?해설?)면서 이 거대한 “벽화”는 디름 아닌
“절망 이후의 연대기”이면서 “나와 타자들이 자유를 낳는 사회순환을 위한 마당”임을 밝힌다.
전집 8권(21-23권, 초판: 2006년 3월)은 4?19혁명기를 시대 배경으로 하여 또 한 장의 거대한 벽화를 펼쳐 보인다.
혁명을 이끈 주축인 학생들과 반대편의 부패한 정권 실세들을 핵심에 두고, 그 주위를 떠돌며 동시대를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포착하여 우리를 격동의 역사 현장으로 안내한다.
시인은 흘러간 시간 속에 들어박힌 ‘뭇사람들의 한순간들'을 날렵한 필치로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면서,
순간이 역사로 화하고 보잘것없는 개인이 역사적 사건의 일부가 되는 이 거대한 움직임을 엄정한 시선으로 하나하나 새겨넣는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오른 김주열(21권) 옆에는 천애고아 구두닦이 오성원이 “저금통장 남기고 총 맞아 쓰러”져(21권) 있고,
한쪽에서는 “신문다발/한 팔로 안은 채” 쏠 테면 쏴보라고 계엄군 병사에게 외치는 김두철(21권)이 우뚝 서 있다.
겉으로는 대통령 “남편의 구멍난 양말/전구알에 끼워서 기우는 아낙이나/안으로는 모두 다 쉬쉬하는 권력의 황후”
프란체스카(21권)와 도저히 “부족을 못 견”디고 “만족을 못 견딘” 여인 박마리아(21권)가 있는가 하면,
경찰기동대장 남편은 데모 진압으로 “엿새째 집에 오지 않”건만 “장바구니 들고/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가
제비사내를 만나 “혁명의 밤” 여관 구석방에서 “뜨겁게 살아”나는 한 여자(21권)가 있다.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의 죽음은 너무나 흔하고 허망하고, 뒤에 남은 사람들의 사연은 처절하기만 하다.
혁명은 금세 “저만치 실 끊긴 연처럼 너울너울 꼬리 내"리고(22권), 각성제를 먹어가며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면서도
”붕어빵 두 개만 먹으면 원이 없겠다“는 미싱 견습공 임옥남(21권)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밖에 아무것도 없"는 시간(23권)만 흐를 뿐이다.
그리고 곧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고 숱한 죽음의 행진이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점치며 죽음으로써
부활하는 시의 갱신을 다짐하는 시인의 의지를 새겨볼 일이다.
풀뿌리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역사의 골짜기에 묻혀가는 인물들에 다시금 혼을 불어넣는 작업은 전집 9권(24-26권, 초판: 2007년 11월)에서도 예외없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특히 고승들의 삶과 행적을 좇으며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불교사를 복원해내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하여 대선사나 고승들의 삶을 경외의 대상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역사 속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데 주목하여 그들의 삶 자체를 직시하는 한편 해학과 비판적인 요소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의 불법이 곧 “숭엄한 국법이고 삼엄한 상하 계율”인 자장(26권)과 “걸병표”의 원광(26권)을 빗대어 우리 역사에서 뿌리깊은 사대주의를 꼬집고,
“최초의 창씨개명”자 이동인(25권), “일본 조동종과/조선불교의 합종”을 꾀했던 이회광(25권),
“해인사 홍제암/사명대사비를 깨고/사명대사 영정을 떼어”내기까지 한 변설호(26권) 같은 친일승들의 행적을 준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시인은 많은 시에서 탈속한 고승들의 고매한 정신을 드높이지만, 세속과 탈속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면서 고승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뒤집어 보여주기도 한다.
상사병이 들어 “설법 듣다가/거품 물”고 끝내 미쳐버린 봉령 수좌(24권), 남색에 빠진 노승 통현화상(26권)이나 서울에 살게 되면서
“정액을 흔전만전 쏟아버리는 병”이 들자 산중으로 돌아간 몽설당의 여러 스님들(26권)에게서는 해학과 더불어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
불교사를 복원하는 한편에는 지난 작업의 연장선에 서 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본처 아들에게/왕위를 빼앗기고 갇혔다가/아들의 나라 무너지는 날/딱하디딱한 길라잡이나 되어버”린 견훤(26권)같이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을 통해서는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고,
“북으로 돌아갈 수있어도/가지 않고” 그냥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굽은 소나무같이 살아가”는 ‘깐수’ 정수일(25권)이나
다산의 딸 홍임이(25권)처럼 역사의 뒤안에서 건져올려 시적으로 승화시킨 당대 인물들에 대한 소묘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통시적이며 우리 민족의 모든 인간상을 두루 포함시키려는 시도의 소산”이라는 평가(김용직, 26권 ?해설?)에 걸맞게
시인은 민초들의 삶과 우리 역사의 빛과 그늘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평가하는 작업을 해왔다.
시의 형태로 일구어내는 이러한 역사 다시쓰기는 우리 문학사에 눈부신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번에 만인보 완간을 마무리하는 신간으로 662편을 담은 전집 10권(27-28권)과 11권(29-30권, 초판: 2010년 4월)이 출간되었다.
이번 신간에는 이전 작업에서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다룬 「봉하 낙화암」을 비롯해 당대인물들(수경 문정현 안선재 김신용 등)을 다루고 있거나,
시인의 기지가 잘 발휘되는 역사의 이면 존재한 인물(「약횡」)들과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시들(「함석창」 「백씨」 「현영섭」 「박상현」 「박춘금」 등) 또한 담겨 있다.
하지만 이번 신간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편들은 5·18 광주에 대한 소재들이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직후 감옥에서 구상한 만인보의 종착지가 광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광주 시편들은 가감없는 잔혹한 장면들의 묘사로 당시의 참혹함을 전해주는 한편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을 밑바닥까지 파헤쳐 부당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고통과 항쟁 이후 이어지는 그들의 아픔과 지옥 같은 일상의 묘사(「인배」 「인배 어머니」 등)는 문학작품만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다.
매어놓은 중송아지야/너한테 물어보자/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인가/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이 아닌가/똥개야 누렁이야/너한테 물어보자/인간이란 무슨 놈의 짐승이냐(...)/
길가 자갈/너한테 물어보자/인간이란 무엇이냐/인간의 몸은/몸이 아니라/보릿자루였다/쌀자루였다 소금자루였다/대검으로/푹 찔러버렸다(...)/월산동에서/임신부가 배 찔려 죽었다/뱃속의 태아 죽었다
-「학살풍경화」 부분
시인 그리는 학살의 풍경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를 넘어선다.
동시에 시인은 광주의 공간을 시민 사이에 아무런 댓가 없이 상부상조하는 따듯한 공동체(「공동체」)로 그리기도 하고 고도의 상징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윤상원의 총은 총이 아니라
5월의 상징
5월 광주의 의미 그것
그것은 끝가지 쏴버리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바다 파도였다
-「바다 파도」 부분
시인의 시선은 이미 잘 알려진 열사에만 가 있지 않다.
무명씨, 뱃속 아기, 고아, 재수생, 택시기사, 버스기사, 약혼녀, 약혼남, 부모자식... 에 이르기까지 필부필부, 남녀노소 모두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 진혼한다.
시인이 이처럼 30주기를 맞는 5.18을 호출하고 진혼하는 데에는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억울하게 절명한 영혼들의 삶을 시 안에서라도 이어주려는 문학적 고뇌가 담긴 것이다.
「어떤 예언」(29권)에서처럼 망자들의 피는 거룩하고, “모든 생은 재생이리라”고, “살아서 다시 오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뱃속의 태아인 상태로 학살당한 아기를 살려내어 2030년에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되어 광주를 방문한다는 탁월한 설정과 상상력(30권 「2030년 5월」)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삶의 날들이 있다// 오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기어이 사람이다”(1권 「서시」)로 시작한 만인보가 기나긴 여행과 순례와 고행 끝에 총 4001편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30권 마지막 시 「그 석굴 소년」에서도 잘 들어난다.
“이 세상의 길고 긴 이야기 다함 없느니/ 오늘밤도 그대 따라가는/ 만인의 삶 이야기 삶과 죽음 이야기 그칠 줄 모르리// (...) 다할 줄 모르는 영겁의 돌책이여 돌노래여 돌이야기들이여”
시의 길이 석굴 속의 고행일지라도,
“죽음은 삶의 중단/ 삶은 죽음의 중단”(「젖가슴」)일지라도 그 중단을 넘어 시인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늘 진행형으로서의 시 자체이다.
이제 우리는 시인이 선사해준 ‘세상의 삶들, 희로애락들, 세상의 온갖 사연들, 세상의 죽음들, 온갖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사연들’
(「그 석굴 소년」)에 귀기울이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문학사뿐만 세계문학사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역작의 탄생과 완성의 순간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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