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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탄신 466주년 · 한산도대첩

2011.04.27 11:23

arcadia 조회 수:1548 추천:52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 탄신 466주년 ·















































역사스페셜
· 철저분석 한산대첩
2011-04-28








   
4월 28일은 충무공의 탄신일 466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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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대첩 (閑山島大捷)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閑山島大捷)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98) 장군의 탄신 466주년

(장군의 음력 생일 3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이 되는 날이다.

장군의 무공이야 헤아릴 수 없지만 그 中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왜선 59척을 침몰시키고 왜병 9000여 명을 전사시켰다.

- 28일 KBS 1TV 역사스페셜 ‘철저분석, 한산대첩’을 방영한다.
한산대첩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見內梁破倭兵狀)’ 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철/저/분/석, 한산대첩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 학의 날개가 펼쳐졌다.

학.익.진! 조선 수군이 펼친 학익진(鶴翼陣)에 왜선 59척이 침몰하고 9천여 명의 왜군이 전사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 버린 결정적인 전투, 한산대첩(閑山大捷)이었다!
최정예 일본 수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이룬 한산대첩(閑山大捷). 그 승리의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최정예 일본 수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비결,
그 비결은 조선 수군의 정확한 ‘연속 포사격’ 이었다!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바다, 견내량.
이곳에 정박한 70여척의 왜선들을 어떻게 격파할 것인가.
그러나 좁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은 전투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전술에 능통했던 이순신,

‘왜적을 모두 잡아버린다(全捕之計)’는 목표를 세우고 작전을 계획한다!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아 ...중략... 한산도 바다로 끌어내어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 <장계> 中



일본의 대함대를 넓은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견내량에 보내진 6척의 유인함선.
퇴각하는 함선과의 치열한 추격전 끝에 일본 함대가 마주하게 된 것은 커다란 학의 날개처럼 포위해 오는 조선 수군이었다!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포격에 순식간에 격파된 일본 함대. 이순신은 우리 전선에서 교대로 쏘아대는 화살과 포탄의 형세를
마치 폭풍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넓은 바다로의 ‘유인’과 ‘포위’로 이어지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였던 한산대첩.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見內梁破倭兵狀)을 중심으로 한산대첩 전투의 과정을 추적해본다!



 
철/저/분/석, 학익진! - 과연 완벽한 진법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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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의 학익진도(왼쪽)

학익진은 U자형의 진법으로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포위해 싸우기에 적합했다.
그런데 해상에서 배가 적선을 향해 이동할 때 측면의 포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조선 함포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옥선(板屋船·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선.
1층에 노꾼을, 2층에 전투원을 배치했다)이었다.





  •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확인할 수 있는
       ‘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


  • 보통 학익진은 횡렬진, 또는 ‘기장(箕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학익진은 U자형의 진법으로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포위해 싸우기에
    적합한 진법이다.
    그렇다면 해상에서 학익진은 완벽한 전술이었을까?

    전선(판옥선)은 선수(뱃머리)보다 많은 수의 포가 배치 된 배의 측면을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배가 적선을 향해 이동하면서 측면의 포를 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의 화포는 발사 후 재장전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학익진, 화포 발사 후 신속한 대처 없이는 배에 올라타 공격하는 왜군의 등선육박전술에 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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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옥선의 모습



     
    조선 수군, 승전의 비결은 ‘연속 포사격’!



  • 조선 시대의 전투지침서인 <수조규식>,


  • ‘타수가 배를 부려 주위를 선회하며 4면에 장착된 화포를 일제히 발사한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투 규범은 함포 재장전 시간을 단축시켜 효과적인 함포사격을 위한 것으로,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판옥선’(板屋船)이었다!
    왜군의 병선(安宅船)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판옥선의 선회를 통해 연속적인 포격을 했던
    조선 수군의 공격에 조총이 주무기였던 왜군의 반격이란 쉽지 않았다.

    함포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판옥선, 조선 수군의 승리의 비결이었다!



    '조선의 병선은 빠르기가 나는 용과 같고

    가까이 접근하여도 올라가기가 어려우며

    대포도 무서우니 수전(水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 조선 판옥선에 대한 왜군의 평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빛나는 한산대첩!



    임진왜란 발발 후, 불과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면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은 조선.
    한산대첩은 대륙침략을 향한 일본의 야욕과 오만을 꺾어버린 일대
    반격 이었다!



    '한 번의 전투로 적의 한 쪽 팔을 잘랐다'   - 유성룡의 <징비록> 중



    연합함대를 이끈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전략가적 면모, 조선 수군의 강력한 무기들로 가능했던 한산대첩.
    최정예 일본 수군의 패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제해권(制海權)을 확보,
    호남·충청 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으며
    이후 임진왜란은 강화교섭기에 접어들어 사실상 임진왜란은 끝이 난 것과 다름없었다.



    동아시아 해군의 저력을 보여준 이순신과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평가 받은 한산대첩.
    세계 해전사에서도 빛나는 이순신과 한산대첩의 영향력을 확인해본다!









    불멸의 이순신 명 장면!


































      
    이순신의 죽음






    이순신은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피할 수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그해 8월 18일 병사해 철군령이 내려졌다.
    『선조실록』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磷)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그냥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이 충무공 행록
    (行錄)』은 진린이 보내주자면서 ‘황제가 하사한 장검이 있다’ 고
    협박까지 했으나 이순신은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거절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전날 밤 자정 하늘에
    ‘이 적을 제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
    死則無憾)’라고 기도했다.
    도망가는 적을 향해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이순신은 용감했지만 무모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들이 순신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 고

    마치 표적을 자청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선조실록』은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하자
    선조는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다.
    선조는 전에도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之罪)를 비롯해 네 가지 죄를 지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고 말한 인물이었다.



    이순신 자살설이 나온 이유는 종전(終戰)이 가시화되면서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柳成龍)도 공격받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전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천민도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면천법(免賤法), 양반도 군역의무를 지는 속오군(束伍軍),
    부호가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는 작미법(作米法: 후의 대동법) 등을 실시해 조선을 위기에서 건졌다.
    종전이 기정사실이 되자 양반들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옛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유성룡 제거에 나섰다.



    『서애(유성룡) 연보』는 유성룡 공격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실망해서,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 라고 탄식했다” 고 전한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도 파직 당한다. 두 인재를 죽이고 조선은 다시 사대부의 천국
    으로 되돌아갔다.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인재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해 왔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깊게 성찰할 때다.

    지금은 이런 어두움이 사라졌는가?


    - 글·중앙일보. 역사평론가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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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충남 아산에서 보내며 무예를 닦았다.
    아산 현충사는 그런 충무공을 기리는 장소다. 현충사 입구는 공의 충성심을 기리는 의미에서 ‘충의문’으로 부른다.








     
    이순신 탄신 466주년 충무공의 3대 리더십







  • 『칼의 노래』 저자 김훈이 말하는 충무공의 3대 리더십!


  • - 부하에 서릿발 같으면서도 젊은 병사 애정문제까지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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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널리 알려진 충무공 영정. 아산 현충원에 있다. 1952~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려 73년 문화공보부가 표준 영정으로 정했다.

    28일은 이순신(1545∼98) 장군의 탄신 466주년이 되는 날이다.
    장군의 음력 생일 3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28일이
    된다. 소설가 김훈(63)씨를 23일 만났다.

    100만 부 넘게 팔린 그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의 총체적
    면모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물론 인간적 면모까지 엿볼 수 있는 ‘안내서’로 소설가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형국인데도 정쟁에 매달리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환멸, 도탄에 빠진 백성에 대한 연민,
    무엇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 이순신의 내적 번민 등을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문체에 담아낸 게 주효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터에서 발휘한
    힘의 대부분은 사실의 힘에서 비롯된다” 고 했다.
    말하자면 ‘사실의 리더십’이다.



    “당시 문인 권력은 당파에 매몰돼 동서로 나뉘어 고질적인 당쟁만을 일삼았는데
    이순신은 바다에서 벌어지는 사실에 입각해 주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이게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중시한 이순신의 면모가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는 설명이다.



    이순신 리더십의 두 번째 덕목은 모순된 것들을 하나의 인격 안에 끌어안는
    일종의 ‘포용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문제를 일으킨 부하들을 처벌하는 대목만 『난중일기』에 123차례나 등장한다”고 했다.
    ‘문제 사병’들은 상당수 처형됐다. 김씨는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그렇게 엄격했으면서도
    피 끓는 젊은 부하들의
    애정관계를 파악하고 있었을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서릿발처럼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침묵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이순신은 모함을 당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돼
    40여 일 옥에 갇혀 여러 차례 고문을 당했을 텐데도
    『난중일기』 어디에도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했다.
    “사사로운 원한이나 개인적 욕심에 구애받지 않는, 보다 큰 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적 기록인 『난중일기』에도 이를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침묵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사실을 챙기는 이순신의 힘은 정말 놀라운 것”이라며

    “『난중일기』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런 면모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진년(1592년) 2월 1일 일기를 들었다. 일기는 ‘안개가 끼고 비가 잠시 내리다가 늦게 갬’이라고 날씨부터 적고 있다.
    이어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선상에 나가서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마침 피라미 떼가 웅덩이 안으로 몰려들었기에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다’라고 적었다.



    김씨는 “나는 2000여 마리라고 구체적으로 쓴 게 놀랍다”고 했다.

    “최고지휘관이 생선 마릿수를 직접 셌을 리는 없을 테고 부하들이 보고한 것일 테지만 빼놓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순신이 사물을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파악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김씨는 “어떤 날의 일기에는 청어 1130마리, 말린 생선 202두릅 등 잡은 물고기 수를 한 자릿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말했다.
    또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1598년 10월의 일기에는 지방 백성으로부터 받은 군량미를 ‘쌀 4되’ 단위까지 밝혀 적었다”고 했다.



    김씨는 “쌀 4되라는 것은 거대한 군사 조직 앞에서는 정말 한 움큼밖에 안 되는 적은 양”이라며
    “당시 그의 부대가 처했던 가난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런 사실을 기록하던 장군의 겸허한 태도가 느껴진다”고 했다.



    김씨는 “사실을 중시한 이순신의 면모는 『임진장초』에 더 잘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1592년 4월 15일 왕에게 보낸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이라는 편지를 예로 들었다.
    편지는 ‘4월 14일 발송돼 오늘 4월 15일 술시에 접수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라고 시작한다.
    원균의 공문에 따르면 ‘부산포에 나타난 왜선 90척이 세견선(무역선)으로 보이지만
    혹시 몰라 소속
    관포(官浦)에 지시해 사변에 대비하겠다’고 적혀 있으나,
    이순신 자신이 보기엔 세견선 선단으로는 심상치 않기 때문에 수군절도사 등에게 긴급히 통고했다는
    내용이다.



    김씨는 “공문 문장이 신문사 경찰기자가 기사 쓰듯이 육하원칙에 입각해,

    편지를 주고받은 시간을 먼저 쓰고 그 다음 객관적으로 내용을 적어 내려간 점이 놀랍다”고 했다.
    또 원균에게 공문을 받은 즉시 왕에게 두 시간 안에 장계를 보낸 신속함, 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두 시간 동안
    필요한 조치를 취한 점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 불분명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사물의 밑바탕을 챙길 줄 아는 사실적 정신, 사실에 바탕해 전쟁을 수행한 점 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그 같은 사실에 입각한 리더십이 오늘날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물었다.
    최근 검찰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검찰을 강하게 질타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김씨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요즘은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신념의 언어가 너무 난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씨가 생각하는 신념의 언어란 언론은 물론
    잇속 챙기기에 바쁜 정치권의 언어를 가리키는 듯했다.



    김씨는 “최근 국사 과목이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선정된 것은 100% 잘된 일이지만
    앞으로 어떤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칠지에 대해서는 거대한 논란이 예상된다”고 했다.
    당파성이 아닌 사실에 입각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리더에게 필요한 건, 신념의 언어 아닌 사실의 언어”




    1592년 1월 1일 쓰기 시작해 1598년 11월 17일 끝마친
    장군의 『난중일기』는 전쟁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김씨는 대학생 때
    『난중일기』에 감화돼 소설가가 됐다.
    ‘신문사 사건기자의 6하 원칙에 따른
    스트레이트 문장이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는
    김씨의 문장론도 『난중일기』의
    담백한 문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금 어떤 의미가 있겠냐”
    고 바로 물었다.

    김씨는 “이순신 리더십의 본질은 사물의
    밑바탕을 챙길 줄 아는 사실적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사실에 바탕한 힘으로 거대한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인터뷰 도중 ‘팩트(사실)에 입각한 리더십’ 을 수차례 꺼내들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사실보다 당파성에 매몰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물론 언론도 사실에 입각한 정신이 부족하다.

    리더는 신념의 언어가 아닌 사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임금에게 보낸 전황 보고서인 장계(狀啓)를 모은 책)를 짚어가며
    ‘이순신의 리더십’을 풀어갔다



    - 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이다.



    “나는 장군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순신에 대한 내 나름의 느낌과 생각은 있다.
    나는 그의 리더십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항상 놀라게 되는 것은 장군이 언제 어떤 경우에나 사실에 입각해서 글을 쓰고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 구체적인 사례는.



    “『난중일기』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런 덕목을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발생 직전인 1592년 2월 1일 일기를 보면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는 구절이 있다.
    1596년 1월 6일 일기에는 ‘오수(吳水)가 청어 천삼백열 두름을, 박춘양은 칠백여든일곱 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이백두 두름을 바쳤다’는 대목이 있다. 오수는 아마 물고기 잘 잡는, 직위 낮은 부하였던 모양이다.
    사령관이 물고기 마리 수를 세어봤겠나. 아마 부하들이 센 것을 적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장군이 사물을 정확한 사실로 들여다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고지휘관임에도 이런 걸 꼼꼼하게 챙긴 거다.”



    - 그런 리더십이 어떻게 힘을 발휘하게 되나.



    “나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파악하는 데 『임진장초』가 더 흥미로운 사료라고
    생각한다.
    1592년 4월 15일에 보낸 장계는 ‘4월 14일 발송되어 오늘 4월 15일 술시(戌時)에 접수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라는
    문장으로 시작
    한다. 이순신은 원균의 공문이 언제 발송돼 도착했는지부터 적고 있다.

    장군은 이렇게 정확한 사람이었다. 술시는 오후 7~9시다. 장군은 공문을 아마
    7시쯤 받았을 것이다.
    공문을 보고 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 등에게 사변(事變)에 대비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임금에게 올릴 편지를 쓰는 데 두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임금에게 장계를 보낸 시간 역시 술시로 되어 있다.
    장계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정보의 유통과정, 즉 두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런 점들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나타나 있다.
    장군이 전투에서 발휘한 힘의 대부분이 이런 사실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 장군은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됐을까.



    “장계는 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임금에게 보낸 가장 정확한 문서다.

    신문사 사건기자가 기사를 쓰듯 6하 원칙에 따라 시간을 먼저 쓴다. 장군의 문장이 결코 아름답거나 철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장군의 문장을 통해, 나는 그가 사물의 밑바탕을 챙기는 사실적 정신, 사실에 바탕한 힘으로 전쟁을 수행했음을 알게 됐다.
    이게 장군의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중 사실 기술이 돋보이는 대목



    ▶ 난중일기



    -1592년(임진년) 2월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선창(船艙)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水場)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1596년(병신년) 1월 6일

    비가 계속 내렸다. 오수(吳水)가 청어 천삼백열 두름을, 박춘양은 칠백여든일곱 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이백두 두름을
    바쳤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군량 오백여 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1598년(무술년) 10월 7일 맑음.

    아침에 송한련이 군량 넉 섬, 조 한 섬, 기름 다섯 되, 꿀 석 되를 바치고
    김태정이 쌀 두 섬 한 말을 바쳤다.



    ▶ 임진장초



    -1592년 4월 15일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룁니다. 4월 14일 발송되어 오늘 4월 15일 술시에 접수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



    ※출전 『교감 완역 난중일기』(민음사), 『충무공 전적보고문 임진장초』(연경문화사)



    ☞◆ 난중일기(亂中日記)=이순신 장군이 7년간의 임진왜란 체험을 기록한 진중(陣中)일기.
    날씨, 전쟁 상황, 부대 내의 갈등은 물론 당시 정치·경제·사회·군사 등에 관해 폭넓게 다루고 있다.
    1962년 국보 76호로 지정됐다.



    ◆ 임진장초(壬辰狀草)=전쟁 상황, 군사상 건의 등을 써서 임금에게 보낸 보고서.
    1592년 4월 15일 보고서부터 1594년 4월 20일 보고서까지 73편으로 구성됐다.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됐다.



    - 중앙일보 글·신준봉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 201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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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 기록화. 이순신 장군이 세계 해전 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뒀다.







      
    13척 VS 133척 명량대첩 진기록 그래도 이겼다







  • 한국사 명장열전 - [이순신]




  • 12척의 군함같지도 않은 군함에다 1척의 전선을 더 구해 가까스로 수군의 모양을 갖춘 이순신은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
    진도와 해남 간의 물목인
    명량해협(鳴梁海峽)-울돌목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작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전부터 겁이 많던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서 적 함대가 나타났다는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전에는 왜선을 찾아다니며 격멸하던 조선수군이었으나 이제는 기다렸다가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군사들도 전과 같은 강병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약졸이 많았다.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적군이 틀림없이 몰려올 것을 예측하고 울돌목의 물길을 조사한 후

    전투에 대비, 왜선을 뒤집어엎기 위해 해저에 철망을 깔기도 하는 등 방비책을
    강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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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4일, 적선 200여 척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왔다.

    다음날 본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이동한 뒤
    이순신은 부하 장령들을 모아 이렇게 유시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도 당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의 형세가 이와 같다.
    제장이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율대로 시행할 것이니 작은 잘못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결의였다.



    그해 음력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무
    후무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왜적이 133척의 대함대인 반면 조선수군은 겨우 13척.
    게다가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수나 군사들 모두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 사이를 뚫고 손수 활을 쏘고
    기를 흔들며 독전했다.



    “안위야! 네가 군율에 죽겠느냐? 도망치면 살 줄 아느냐?”



    “김응함아! 너는 중군으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네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싸워서 우선 공을 세워야 하리라!”



    이 같은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대장선을 비롯한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나머지는 먼 바다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 해전 사상 유례없는 승리인
    명량대첩이다. 이 기적적인 승리로 정유재란은 또다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싸움이 끝난 뒤 일시 고군산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격전의 피로가 쌓여
    여러 날을 앓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산 본가에서 21세의 막내아들 면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본가가 잿더미가 됐다는 비보가 왔다.
    이순신은 병상에서도
    일기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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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어찌 이리도 박정한가! 간장이 찢어지는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슬프다. 내 아들아!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야 한단 말이냐?
    네 형과 어미가 살아 있기에 아직은 연명할 수밖에 없다만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은 듯하구나!’



    세 아들 중 가장 믿음직했던 막내를 잃은 그의 가슴은

    비통함이 극에 달했지만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는
    그래도 계속 싸워야만 했다.



    10월에 목포 근처 고하도로 본영을 옮겼다가 이듬해인 1598년 2월에는 다시
    완도 고금도로 이동했다.
    이때는 군사도 8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전선도
    여러 척 마련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온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그는 대국 장수라는 자만심에다 욕심도 많고 포악해 조선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비위에 거슬리면 목을 매어 질질 끌고 다니기를 재미삼아 했다. 이순신은
    이런 진린을 무마해 전공이 있으면
    그에게 돌리고 결국은 그를 감복시켜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지휘력과 넓은 학식이 이 무지막지한 중국 장수까지 감복시켜
    나중에는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 자기 부하의 처벌권까지 넘겨주니 명나라 수군도 이순신을 무서워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8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그렇지 않아도 싸우기 싫은데 잘됐다면서 길을 터 주자고 했으나
    이순신이 허락할 리 없었다. 철천지원수 왜적을 단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굳은 결의였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대국 장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칼까지 빼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진린이 몰래 터 준 틈을 타 적선 한 척이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 왜선 300여 척이 남해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순신이 출동하니 진린도 마지못해 따라왔다.

    11월 19일 새벽, 노량바다에서 최후의 대결전이 벌어졌다.



    “이 적들을 물리치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도와주소서!”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함대의 앞장에 서서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하고 관음포로 도주하는 남은 적선을 추격했다.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왜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순신과 진린이 번갈아 가며 구원하는 일방
    적선을 한 척 한 척 격침시키는 순간 홀연히 날아온 유탄 한 발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 심장 부근에 박혔다.
    치명상을 당한 그는 좌우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전투를 걱정했다.
    그는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일렀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더라도 알리지 마라.”



    그리고 곧 숨을 거뒀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온 배와 군사들에게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통곡성으로 울렁거렸다.

    조선군은 물론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도 울었다.

    선조 31년(1598) 양력 12월 16일, 장군의 나이 그때 54세였다.



    그의 영구는 우선 남해 노량 현재의 충렬사 자리에 잠시 안치됐다가

    곧 본진이 있던 고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됐다.

    이듬해 2월 11일 아산에 당도한 영구는 금성산 밑에 장사 지냈다가 16년 뒤
    현재의 자리인
    어라산 기슭으로 천장했다. 1604년(선조 37) 이순신에게는
    선무 1등공신에 좌의정 겸 덕풍부원군이 추증됐고,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라고 시호됐으며, 다시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가증됐다.



    현충사는 공이 순국한 지 108년 뒤인 1706년(숙종 32)에 건립돼

    그 이듬해 숙종의 친필 현판이 사액됐다. 그 뒤 200여 년간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는 헐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1932년 충무공유적보존위원회가 앞장서 사당을 재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4월 28일 공의 탄신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56년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 공의 묘소가 사적 제112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67년에는 현충사도 정화 · 단장하고 성역화돼 사적 제155호로 지정됐다.


    - 글·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 201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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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에게서 배워야 할 10가지 교훈





    1545년(인종1)에 태어난 이순신은 32세 되던 1576년(선조9)에 무과에 급제

    처음 관직에 진출했으며, 1591년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에 맞서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최후를 맞는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23전 23승의 신화를 남기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시련을 감내하고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을 지켜낸 이순신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다.






    1. 집안 탓을 하지 말라=
      충무공은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가에서 자랐다.
    2. 좋은 학교,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충무공은 첫 과거에 낙방하고 32세에 겨우 과거에 붙었다.
      그리고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아다녔다.
    3. 윗사람 탓을 하지 말라=

      의롭지 못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으며, 임금의 끊임없는 의심으로 옥살이까지 했다.

      선조는 “임금을 몰라보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4.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뒤 47세에 해군제독이 됐다.
    5. 조직의 지원이나 자본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어 풍부한 물자의 왜군과 싸워
      연전 연승했다.
    6. 끊임없이 공부하라=
      전략과 전술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로 첫 번째 나간 해전에서부터 연승했다.
    7. 정보를 모으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어떤 경쟁에서도 마찬가지다.
    8.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
      승진욕, 금전욕, 명예욕 등 욕심이 큰 뜻을 망가뜨린다.
    9. 결정은 명쾌하게 하라=
      상벌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리더십이 흔들린다.
    10. 공을 탐하지 말라=
      충무공은 모든 공을 부하에게 돌렸고 장계의 맨 끝에 이렇게 썼을 뿐이다. “신도 싸웠습니다.”(臣亦戰)

    - 글·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580호 | 2011.04.28.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위용 드러낸 `이순신대교`.


    `이순신대교`는 2012년 10월 준공목표로,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전남 여수시 묘도동과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순신대교` (공정률 63%)
    가 위용을 드러냈다.
    이순신대교는 왕복 4차로, 총 다리 길이는 주탑 양쪽에
    있는 측경간장 길이 715m(357.5m×2)를 포함해 총 2260m에 이른다.

    특히 주탑과 주탑 사이의 주경간장 길이는 무려 1545m에 달해 일본의 아카시대교 1990m, 중국 시호우먼교 1650m,
    덴마크의 그레이트 벨트교 1624m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 국내 최대 규모의 한국형 현수교량에 해당한다.
    대림산업은 이순신대교의 주경간장 길이를 1545m로 설계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년인 1545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대림산업은 "이순신대교가 들어서는 여수는 이순신 장군이 처음 해군제독으로 부임했던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곳이고,
    광양앞바다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노량해전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점을 고려, 설계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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