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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문학

2016.12.22 05:43

최선호 조회 수:72

 

 

말씀의 문학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창세기 1:1에도 태초가 있고, 요한복음 1;1에도 태초가 나옵니다. 히브리 원어 창세기 태초는 ‘브레쉬트’입니다. 이는 무시간의 차원인 영원의 어느 한 점으로부터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심으로써 시작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의 태초는 ‘아르케’(헬)인데 ‘시작’, ‘기원’, ‘처음’의 뜻으로 시간의 출발을 가리킵니다(창1:1, 잠8:22,23). 창세기의 이는 ‘기원’ ‘처음’의 뜻으로 시간의 출발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영어로 태초를 “In the beginning"이라 하지요. 창세기의 태초는 만유의 시초인 순간에서 그 이후의 창조과정을 말씀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 순간 이전에도 영원하신 선재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신학강의 시간에 교수님들 중에는 창1:1의 태초와 요1:1절의 태초 중 어느 태초가 더 먼저이냐 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요1:1의 태초가 먼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헬로힘(히), 은 ‘엘로아’의 복수형입니다. ‘엘로힘’이 보통명사로 쓰일 때에는 이방의 신들(창31:30;출12;12), 천사들(시8:5), 재판장(출21:6)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곳(창1:1,요1:1)에서처럼 고유명사로 하나님의 성호를 나타낼 때의 문법형태는 복수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수명사로 사용합니다. ‘엘로힘 복수형 명사의 단수용법을 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 로고스(헬)는 원래 이성, 개념, 말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명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가 만물보다 선재하심을 증명해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의 문학은 말씀의 문학이어야 합니다. 문학의 내면에 말씀이 거하시고, 말씀 안에 문학이 살아서 감동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길이 기독문인이 가야할 방향입니다. 말씀이 없는 문학은 죽은 문학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이 문학 안에 거하시고, 문학이 말씀 안에 감동으로 살아있는 문학들 중에서 박두진의 <해, 오도, 하늘>을 들고 싶습니다. (1-3-2015. 기독문협)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최선호 평론: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중 일부 인용.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의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박두진「해」의 전문

百 千萬 億겁찬란한 햇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壓倒하여 주십시오.

 

이리도 새도 없고,나무도 꽃도 없고,

쨍쨍, 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曠野에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온 心魂, 全 靈이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너무도 당신은 가까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오.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오.핏방울이 더욱 더 곱게 하여 주십시오.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傷處마다 만져 주시고,기진한 숨을 다시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당신은 나의 主.당신은 나의 生命.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벌레 같은 이,나 하나 끓는 것을 아셨습니까.

 

또약볕에 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 박두진「오도」의 전문

하늘이 내게로 온다.여릿여릿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스며드는 하늘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초가을 햇볕으로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 박두진「하늘」의 전문

 

 「해」에는 해가 솟기를 기다림, 달밤을 싫어함, 청산을 좋아함,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고 싶은 자아가 절절이 노래되어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광복에의 염원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애타는 갈구이다. 기독교적이라면 그리스도적이요, 메시야적이다. 어둠 속에 억눌린 자의 확실한 해방에의 염원이다. 그러므로 해는 메시야적 절대적 대상이요, 모든 생명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으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는 복음의 예언자로 불려지는 이사야의 예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인간 성품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유(類)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궁극적으로는 전 피조물을 변화시키게 된다(롬18:10 이하). 특히 여기 표현된 사실들은 평강의 왕 메시야가 통치하게 될 왕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도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면 즉, 해가 솟아오르면 이런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서정적 산문시로 개념어나 추상어의 다양한 구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의성어 의태어 활유법 명령법 반복법 종결어미 사용 등을 통하여 자신이 소망하는 자아실현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오도」에서 볕만 쬐는 나 홀로의 광야(曠野)에 핏덩이로 주님을 향해 꿇어 있는 구도자의 모습(자아)을 본다.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 영(全靈)이 주님에게 닳는 지극히 간절한 자아,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의 회화적 감각이 반복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땀어린 기도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직 주님을 향해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간단한 시상을 바탕으로 이와 같이 절절한 믿음의 읊음을 통해 만백성의 공통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박 시인은 이 시에서와 같이 절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午禱」는 기도 중에서도 가장 열심 있는 기도(강청기도)를 의미하기 위한 박 시인 나름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나(자아)의 신앙적 승화로 하늘 즉, 주님과의 주객일체를 이룬다. 이것이야말로 자아의 승리인 동시에 곧 믿음의 승리이다. 믿음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신앙적 신비이다. 즉, 1+1=2이므로 완전한 것이 못된다. 주(1)와 객(1)이 일체가 되는 비결은 1+1로는 될 수가 없다. 1×1=1이 되는 비결을 이루어야 한다. 「하늘」은 이런 이치로 신앙적 자아실현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거(존재)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이,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에 쓰인 점층적 수법은 매우 적절한 강조법이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게로 온다" 시공을 초월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 오셨으니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절대자를 만나는 인생은 자아실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을 살펴보았다. 향수에 배어있는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한계성, 내면적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 등, 여기서 취급한 작품만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정서적 승화는 다른 시작품들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자아의식은 결국 구원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징검다리처럼 인간을 구원의 길목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구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확실한 이정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공헌하는 것 중에 자아의식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이 원고는 설교원고의 보조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