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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으로
2016.12.24 06:06
삶의 놀라움: 넓은 벌 동쪽으로
넓은 벌 동쪽으로/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가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하늘에 성긴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의 전문
돌아가야 한다/해마다 나고 죽은 풀잎들이/잔잔하게 깔아놓은 낱낱의 말을 들으러/피가 도는 짐승이듯/눈물 글썽이며 나를 맞아 줄/산이며 들이며 옛날의 초가집이며/붉게 타오르다가는 잿빛으로 식어 가는/저녁놀의 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지금은 떨어져 땅에 묻히었으나/구름을 새어나오는 달빛에 몸을 가리고/어스름 때의 신작로를 따라나오던/사랑하는 여자의 가졌던 말을/끝내 홀로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그러면 나이 먹지 않은 나의 마을은/옛 모습 그대로 나를 받으며/커단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주고/잊었던 말들을 모두 찾아 줄/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 이근배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전문
정지용의 「향수」는 타향을 떠도는 자의 가슴에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설의적 감탄이 짙은 향수로 배어 있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5연이나 차지하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이 외침은 연설이나 웅변에서 들을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가 아니라, 어쩌면 심 봉사가 심청을 인당수로 떠나보내며 신음하는그런 몸부림일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뜨거운 눈물줄기가 주르르 흐르는 얼굴로 실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그리움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동반한다.
이 시에 담긴 정경이 하나도 낯설지 않다. 그대로 우리의 품이며 정경이고 토속인 바로 우리네의 고향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고향이지만 "밤바람 소리", "함부로 쏜 화살", "밤물결 같은…사철 발벗은 아내",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등에서 왠지 불안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이 시인이 처해있는 시대적 환경의 알레고리적 묘사가 아닐까 싶다. 평화롭고 아늑한 우리의 고향이 일제의 학정과 물려받은 가난에 휩싸여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 시인에겐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지고 있다. 그 넓은 하늘 빛이 그립다니, 얼마나 억눌리고 고립된 삶이었는가 짐작이 간다. 그러므로 무작정 못 잊는 그리움만 읊은 시가 아니라, 정작 그리운 것은 고향이 찾아 누려야 할 참 평화일 것이다. 이는 정경이 그립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데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아파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당시의 민족정서를 우리들 귀에 들려주고 있는 시인의 울음이라면 잘못된 표현일까? 이런 점은 그가 모더니즘의 분위기를 짙게 연출하고 있는 향수의 품에 자리한 자아의식의 일면일 것이다.
자신의 고향을 "리야잔"으로 암시적 표현을 한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자신의 자아의식을 고향과의 반응에서 오는 그리운 사연들을 소망으로 하여 감정 방출을 하고 있다.
역시 잊지 못할 고향을 그리며 "돌아가야 한다…나의 리야잔으로"를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인 욕구는 "…낱낱의 말을 들으러/…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여자의 가졌던 말을/끝내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잊었던 말들을"에서 보이듯이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향한 마음을 '향수'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통한 자기 삶의 말을 들음으로써 오히려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의 미적 가치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정지용의 「향수」와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고향 그리움에 공통점을 이루고 있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형식에서부터 다르게 나타나 있다. 같은 현대시이면서 자유시(내재율)에 해당하지만 전자는 10연 26행으로, 후자는 전연 18행으로 짙은 시정을 읊고 있다. 연을 나누지 않은 후자는 연을 나눈 전자에 비해 호흡이 매우 급하다. 전자를 느릿느릿 걷는 소걸음이라면 후자는 깡충깡충 뛰는 토끼뜀이다. 돌아가야 할 길이 그만큼 급한 느낌을 준다. 시의 형식이 주는 느낌만도 이렇게 다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면을 그린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주제와 소재가 다른데 있을 뿐 아니라 그 추구하는 목표가 같을 리 없다. 전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고향의 정경을 표면적인 주제로 하고 있지만, 내면적 욕구는 진정한 삶의 추구를 위한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자아의식의 발현으로 보아야 하겠다. 후자를 자아의식의 미적 구현을 위한 강렬한 울부짖음으로 본다면, 이런 점에서 두 작품은 향수라는 공통점 외에 서로 자아의식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각 우리에게 향수로 삶의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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