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창작터
| 최선호의 창작실 | 내가 읽은 좋은 책 | 독자창작터 | 비밀글쓰기 | 회원신간 | 추천도서 | 문학자료실 | 일반자료실 |
<삶의 놀라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16.12.25 08:15
<삶의 놀라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누구나 자기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은 절대로 탕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생각과 말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너무도 많다. 탕자의 삶을 살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만 그런 게 아니다.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탕자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분명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의 몫을 상속받아 집을 나간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니다. 집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첫째 아들도 분명한 탕자이다.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분명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온 세상사람이 모두 탕자라는 사실은 너무도 확실하게 입증된다. 자기 스스로가 탕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정체성을 잃고 혼미에 빠진 사람이다. 가정이나 사회,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을 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당하고 있는 정체성을 정확하게 짚어 주셨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 한 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은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눅15:13-19). ‘여기서 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은 자신을 분명히 보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는 자신을 확실히 알았고, 결국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회개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 이렇듯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첫 단계이다. “스스로 돌이켜”는 ‘자신에게 돌아와’라는 뜻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주려 죽을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찾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자신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탕자(蕩子)는 방탕의 사람이다. 방탕은 방종이며, 방종 또한 자유, 낭비, 섹스, 타락, 절제, 향락과 연관이 있다. ‘자유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혼란한 자기 마음을 내던지는 것밖에 안 된다. 자유라는 것은, 우선 자기 내부를 정리하고, 질서를 세운 데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을 정리하지 않은 행동은 임자 없이 멋대로 달리는 말이나 다름 없다. 목표가 없는 행동은 하나의 방종이다. 모든 자유로운 원칙은 그 내부에 질서가 있고, 목표가 분명한 점에 있다’ 이는 피타고라스의 말이다.
오늘을 직시하자. 그리고 우리를 바로 찾자. 평등과 공평의 길은 아무데나 있지 않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공평, 평등은 공평, 평등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공의의 평등과 공평을 우리에게 주셨다.
교회 공동체의 크기가 똑같아야 공평한 것인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크고 작은 것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오직 완전함만이 있을 뿐이다. 나무의 키가 똑같아야 공평한 것인가. 바다의 넓이가 같아야 공평한 것인가? 아니다. 수박의 크기와 대추의 크기는 너무도 다르다. 같은 수박이라도, 같은 대추라도 크기가 모두 다르지 않은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결코 작은 믿음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다. 동성끼리 결혼을 해야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가정은 물론 인간의 삶에 파탄을 던지는 행위이다. 인생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다.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는 넓은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탕자가 주려 죽을 입장에 처한 바와 같다. 이대로 이 길을 가면 모두 멸망하고 만다. 돌아서야 한다. 탕자가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간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살 길이다. 가장 확실하게 절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절망이나 자살을 택하지 않고 확실하게 돌아서는 탕자! 아무리 어려운 삶의 나락에 떨어졌을지라도 절망하지 않는, 이야말로 참 삶의 놀라움이다.
이 놀라움은 하늘에서 내리는 놀라움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식을 향하신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0-23)며 최상의 대우로 환영하였다. 탕자는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우리 인류도 지금 이 누더기들을 박차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확실하게 탕자의 위치를 벗어나야 한다. 이는 다시 없을 삶의 놀라움이 아니겠는가!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51 | <삶의 놀라움> 내가 나의 죄를 발견하고 | 최선호 | 2016.12.25 | 5 |
150 | <삶의 놀라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 최선호 | 2016.12.25 | 2 |
149 | <삶의 놀라움> 인천상륙작전 | 최선호 | 2016.12.25 | 1 |
148 | <삶의 놀라움> 성령 잉태로 | 최선호 | 2016.12.25 | 19 |
147 | <삶의 놀라움> 해야 솟아라 | 최선호 | 2016.12.25 | 5 |
146 | <삶의 놀라움> 존경하는 김 목사님 | 최선호 | 2016.12.25 | 1 |
145 | <글여울>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 최선호 | 2016.12.25 | 1 |
» | <삶의 놀라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최선호 | 2016.12.25 | 1 |
143 | <삶의 놀라움> 룻 이야기 | 최선호 | 2016.12.25 | 1 |
142 | <글여울> 시순절 Lent | 최선호 | 2016.12.25 | 5 |
141 | <글여울> 죽으심, 다시 사심 | 최선호 | 2016.12.25 | 6 |
140 | <싦의 놀라움> 죄짓는 일에 | 최선호 | 2016.12.25 | 2 |
139 | 장애인의 달을 맞아 | 최선호 | 2016.12.25 | 1 |
138 | <삶의 놀라움> 내 삶을 시편에 기대어 | 최선호 | 2016.12.24 | 4 |
137 | <글여울> 5월은 계절의 여왕 | 최선호 | 2016.12.24 | 0 |
136 | <삶의 놀라움> 울음은 인간세상을 초월하여 | 최선호 | 2016.12.24 | 3 |
135 | 주일과 안식일 | 최선호 | 2016.12.24 | 89 |
134 | <삶의 놀라움> 베드로는 결점이 많은 사람 | 최선호 | 2016.12.24 | 1 |
133 | 오늘의 시대정신에 고함 | 최선호 | 2016.12.24 | 1 |
132 | <글여울> 아버지의 마음 | 최선호 | 2016.12.24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