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다
2004.08.23 16:34
가출과 몇 차례의 자살기도
나는 남들 모두 멀쩡히 다니는 고등학교 생활을 2개월밖에 하지 않고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달아났던 가출소년이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그때마다 얼마나 시커멓게 멍들었으랴. 몇 차례의 자살기도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 어머니는 눈물어린 호소로 자식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셨다. 검정고시 합격 후 대학입시에 낙방하고는 머리 깎고 출가(出家)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오래오래 통곡하셨다.
나의 가출이 이유 없는 반항은 아니었다. 지방의 사립 명문 김천고등학교는 내가 입학한 해에 마침 非평준화 지역의 학교였기에 시험을 쳐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 등 주변 대도시의 고등학교는 속된 말로 '뺑뺑이를 돌려' 학생을 뽑았지만, 소도시 김천의 김천고등학교는 선발고사를 통해 좀더 우수한 학생들을 뽑을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은 물론 경주와 안동 등 인근 도시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나는 한 달 만에 학교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첫 번째 월말고사가 끝나자 선생님마다 틀린 문제의 개수대로 '매타작'을 해대니, 문학병에 깊이 걸려 있는 나로서는 학교라는 데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고 말았다.
교련 선생님은 선착순에서 꼴찌를 했다고 "다음 시간 수업에 들어가지 말고 운동장 열 바퀴를 뛰고 와서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교련과목도 싫었던 터에 저 선생님 밑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때마침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형이 "고시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바람에 집안 분위기가 암담하게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나는 무작정 상경, 고교생활을 접었다.
검정고시에는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 바로 그해 8월에 합격했지만 대학입시에서는 연전연패했다. 입시 준비에 매진해도 쉽지 않은 명문대학 입학을 오로지 독학(獨學)으로 준비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미역국을 먹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면증을 비롯한 각종 신경성 질환을 앓게 되었고, 어머니의 주름살은 나날이 늘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지독한 문제아였다.
30여 년의 회오리바람
부끄러운 과거사 고백은 지금부터이다. 나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한 소녀를 향해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소년잡지 펜팔난을 통해 알게 된 한 살 아래의 소녀에게 나는 정성을 다해 편지를 보내곤 했고, 희한하게도 소녀는 정성껏 답장을 보내주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1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 소녀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중퇴, 대입(大入) 실패 등이 가져다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어느 문예지의 대학생 문예공모에 시가 당선되고, 학내 신문사 주최 독후감 쓰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겨우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만날 생각을 했으니, 그 무렵의 나는 어지간히도 숙맥이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절교 선언을 듣고는 얼마나 깊이 절망했던가.
어머니는 나와 그 소녀와의 교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다. 편지를 함께 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그 소녀와 맺어지기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중앙대에 합격을 해놓고 1년간 휴학을 해야만 했을 때였다. 심신이 피폐해져 위험수위에 이르러 있었다.
병원의 처방전이 아무 소용이 없는 지독한 불면의 나날이었다.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대학생이 된 그 소녀(처녀나 아가씨로 표현해야 하겠지만 그냥 쓴다)에게 김천에 내려와 아들을 위해 몇 마디라도 격려해 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한 소녀는 바로 그때 절교를 결심했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꿈에 부풀어 첫 만남을 편지로 요청했었고,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30년 동안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점을 하셨다. 아버지는 박봉의 경찰직을 그만둔 이후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 일을 돕기는 했지만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아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을 것이다.
거기다 사법고시 합격으로 자신의 실패한 생을 보상해 주리라 믿었던 큰아들은 법학과를 졸업하자 문학을 하겠다고 국문학과로 편입하고, 작은아들은 고등학교도 안 다니고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고, 막내는 고교시절 내내 공부를 전폐하고 철학책을 끼고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도 학교에는 안 나가고……. 해소병을 앓는 어머니(나의 할머니)는 치매 증세를 보이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회오리바람을 잠재우며 3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고서 초등학생들한테 연필과 공책을 판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의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해오셨다. 겨울 내내 동상으로 고생하시고, 매일 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신음을 내뱉으며 잠드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 종아리에 배인 알통을 풀어 드리려 주먹으로 두드리며 마사지를 하는 것은 내 성장기의 중요한 일과였다.
서정주 시인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겠지만 나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살을 나는 사랑한다. 올해 일흔넷인 어머니의 여생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기를 소망한다.
―『월간조선』(2004. 9)
나는 남들 모두 멀쩡히 다니는 고등학교 생활을 2개월밖에 하지 않고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달아났던 가출소년이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그때마다 얼마나 시커멓게 멍들었으랴. 몇 차례의 자살기도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 어머니는 눈물어린 호소로 자식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셨다. 검정고시 합격 후 대학입시에 낙방하고는 머리 깎고 출가(出家)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오래오래 통곡하셨다.
나의 가출이 이유 없는 반항은 아니었다. 지방의 사립 명문 김천고등학교는 내가 입학한 해에 마침 非평준화 지역의 학교였기에 시험을 쳐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 등 주변 대도시의 고등학교는 속된 말로 '뺑뺑이를 돌려' 학생을 뽑았지만, 소도시 김천의 김천고등학교는 선발고사를 통해 좀더 우수한 학생들을 뽑을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은 물론 경주와 안동 등 인근 도시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나는 한 달 만에 학교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첫 번째 월말고사가 끝나자 선생님마다 틀린 문제의 개수대로 '매타작'을 해대니, 문학병에 깊이 걸려 있는 나로서는 학교라는 데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고 말았다.
교련 선생님은 선착순에서 꼴찌를 했다고 "다음 시간 수업에 들어가지 말고 운동장 열 바퀴를 뛰고 와서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교련과목도 싫었던 터에 저 선생님 밑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때마침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형이 "고시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바람에 집안 분위기가 암담하게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나는 무작정 상경, 고교생활을 접었다.
검정고시에는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 바로 그해 8월에 합격했지만 대학입시에서는 연전연패했다. 입시 준비에 매진해도 쉽지 않은 명문대학 입학을 오로지 독학(獨學)으로 준비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미역국을 먹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면증을 비롯한 각종 신경성 질환을 앓게 되었고, 어머니의 주름살은 나날이 늘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지독한 문제아였다.
30여 년의 회오리바람
부끄러운 과거사 고백은 지금부터이다. 나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한 소녀를 향해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소년잡지 펜팔난을 통해 알게 된 한 살 아래의 소녀에게 나는 정성을 다해 편지를 보내곤 했고, 희한하게도 소녀는 정성껏 답장을 보내주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1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 소녀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중퇴, 대입(大入) 실패 등이 가져다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어느 문예지의 대학생 문예공모에 시가 당선되고, 학내 신문사 주최 독후감 쓰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겨우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만날 생각을 했으니, 그 무렵의 나는 어지간히도 숙맥이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절교 선언을 듣고는 얼마나 깊이 절망했던가.
어머니는 나와 그 소녀와의 교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다. 편지를 함께 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그 소녀와 맺어지기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중앙대에 합격을 해놓고 1년간 휴학을 해야만 했을 때였다. 심신이 피폐해져 위험수위에 이르러 있었다.
병원의 처방전이 아무 소용이 없는 지독한 불면의 나날이었다.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대학생이 된 그 소녀(처녀나 아가씨로 표현해야 하겠지만 그냥 쓴다)에게 김천에 내려와 아들을 위해 몇 마디라도 격려해 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한 소녀는 바로 그때 절교를 결심했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꿈에 부풀어 첫 만남을 편지로 요청했었고,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30년 동안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점을 하셨다. 아버지는 박봉의 경찰직을 그만둔 이후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 일을 돕기는 했지만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아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을 것이다.
거기다 사법고시 합격으로 자신의 실패한 생을 보상해 주리라 믿었던 큰아들은 법학과를 졸업하자 문학을 하겠다고 국문학과로 편입하고, 작은아들은 고등학교도 안 다니고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고, 막내는 고교시절 내내 공부를 전폐하고 철학책을 끼고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도 학교에는 안 나가고……. 해소병을 앓는 어머니(나의 할머니)는 치매 증세를 보이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회오리바람을 잠재우며 3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고서 초등학생들한테 연필과 공책을 판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의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해오셨다. 겨울 내내 동상으로 고생하시고, 매일 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신음을 내뱉으며 잠드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 종아리에 배인 알통을 풀어 드리려 주먹으로 두드리며 마사지를 하는 것은 내 성장기의 중요한 일과였다.
서정주 시인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겠지만 나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살을 나는 사랑한다. 올해 일흔넷인 어머니의 여생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기를 소망한다.
―『월간조선』(200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