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05.11.02 13:42
글/이기호_ 소설가. 1972년생. 소설 『최순덕성령충만기』 등
지난해 출간된 첫 창작집에 대한 ‘창작후기’라는 것을 써달란다. 솔직히 난 그 소설집에 대해선 별 달리 할 말이 없다. 선배 작가들이나 동료 작가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 역시도 내 소설에 대해 스스로 이러쿵저러쿵 발언한다는 건, 그건 참 쑥스럽고 저절로 얼굴이 불콰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나처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소설을 쓴 자에게 그런 지면은, 십중팔구 자기변명을 늘어놓거나, 또 다른 소설로 기억을 왜곡할 게 뻔할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화끈거림을 피해볼 요량으로 좀 다른 말을 해볼까 한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왔다. 91년부터이니까 벌써 십수 년째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잘 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공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S와 P선배, N후배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그 사람들이 내 ‘창작후기’나 다름없는 인물들이니까.
나의 부친은 지방 중소도시에서 삼십 년 넘게 말단 공무원으로 재직하셨다. 부친은 당신의 많지 않은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해 나의 등록금과 하숙비와 용돈을 제 날짜 한 번 어기지 않고 올려보내주셨다. 91년엔 전동타자기를 사주셨고, 92년엔 워드프로세서를, 95년엔 486컴퓨터를 사주셨다. 전업주부인 어머닌, 콩나물 값을 아껴 아버지 몰래 내 카드빚을 몇 번 막아주기도 하셨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난, 에어컨 바람 빵빵하게 나오는 국립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처한 환경이었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 당시부터 탁월한 문재(文才)로 나의 질투를 한몸에 받던 S는, 그러나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부터 고된 입시학원 강사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P선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보다 세 해 먼저 신춘문예로 등단한 선배는 그때 이미 신용불량자라는 또 다른 꼬리표를 지니고 있었다. 선배는 자신의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 상사의 곱지 않은 눈총을 감내해야만 했다. 각종 문예지 신인상 심사의 단골 결심 진출자 N후배는 또 어떠했나? 아버지의 작은 공장이 IMF로 결딴나고, 잡지사 말단 기자로 들어가 주당 55시간 이상 폭압적인 노동조건에 시달렸던 후배는, 그러면서도 간간이 내게 소설을 보내왔다. 허나 그 후배 역시 삼 년 전부턴 아무런 소식이 없다. S와 P선배, N후배. 그들은 모두 내가 따라잡을 수 없었던 문장과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썼던 소설 원고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 질투의 요체들을.
예전 어디선가 조세희 선생이 직장을 다니면서 점심시간 공원에 나와 ‘난장이’ 시리즈를 썼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과 내용은 충분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또 그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는 우리 세대에게 전 세대의 행동 양식을 적용시키는 것처럼 무식한 처사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왜냐면 그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변한 게 아니라, 소설이 처한 환경이 변한 것처럼.
소설이란(이제 막 시작한 내가 느끼기에) 철저히 논리의 산물이고 노동의 산물이 아니던가. 그건 또 집중력의 산물이 아니던가. 환경의 산물이 아니던가. 점심시간 공원에서 글을 쓰던 선배 작가의 신화를, 내 많은 동료들에게 적용하기엔 우리 사회와 우리 시장이 너무 각박하고 야속해졌다. 그 누구도 내 동료들을 찬찬히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이지 운이 좋은 놈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벌이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지도 않으셨다. 환경이 네 소설을 만들었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반론을 펴지 못하겠다. 내 환경이 S와 P선배, N후배와 같았다면 나 역시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창작후기’란 별 게 없다. 소설은 기다리면 찾아온다.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얼마나 소설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느냐,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의 싸움이다. 그건 철저한 리얼리즘의 세계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나는 늘 미안했다. 나보다 더 문재가 출중했던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이건 정직한 경쟁이 아니다. 그런 부채감에서 나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반칙의 시작을, 반칙으로 마무리하지 않으려 허리를 더 곧추 세우는 길밖에. 그것이 내가 가진,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재야의 고수들에 대한 예의이다.
지난해 출간된 첫 창작집에 대한 ‘창작후기’라는 것을 써달란다. 솔직히 난 그 소설집에 대해선 별 달리 할 말이 없다. 선배 작가들이나 동료 작가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 역시도 내 소설에 대해 스스로 이러쿵저러쿵 발언한다는 건, 그건 참 쑥스럽고 저절로 얼굴이 불콰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나처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소설을 쓴 자에게 그런 지면은, 십중팔구 자기변명을 늘어놓거나, 또 다른 소설로 기억을 왜곡할 게 뻔할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화끈거림을 피해볼 요량으로 좀 다른 말을 해볼까 한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왔다. 91년부터이니까 벌써 십수 년째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잘 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공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S와 P선배, N후배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그 사람들이 내 ‘창작후기’나 다름없는 인물들이니까.
나의 부친은 지방 중소도시에서 삼십 년 넘게 말단 공무원으로 재직하셨다. 부친은 당신의 많지 않은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해 나의 등록금과 하숙비와 용돈을 제 날짜 한 번 어기지 않고 올려보내주셨다. 91년엔 전동타자기를 사주셨고, 92년엔 워드프로세서를, 95년엔 486컴퓨터를 사주셨다. 전업주부인 어머닌, 콩나물 값을 아껴 아버지 몰래 내 카드빚을 몇 번 막아주기도 하셨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난, 에어컨 바람 빵빵하게 나오는 국립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처한 환경이었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 당시부터 탁월한 문재(文才)로 나의 질투를 한몸에 받던 S는, 그러나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부터 고된 입시학원 강사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P선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보다 세 해 먼저 신춘문예로 등단한 선배는 그때 이미 신용불량자라는 또 다른 꼬리표를 지니고 있었다. 선배는 자신의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 상사의 곱지 않은 눈총을 감내해야만 했다. 각종 문예지 신인상 심사의 단골 결심 진출자 N후배는 또 어떠했나? 아버지의 작은 공장이 IMF로 결딴나고, 잡지사 말단 기자로 들어가 주당 55시간 이상 폭압적인 노동조건에 시달렸던 후배는, 그러면서도 간간이 내게 소설을 보내왔다. 허나 그 후배 역시 삼 년 전부턴 아무런 소식이 없다. S와 P선배, N후배. 그들은 모두 내가 따라잡을 수 없었던 문장과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썼던 소설 원고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 질투의 요체들을.
예전 어디선가 조세희 선생이 직장을 다니면서 점심시간 공원에 나와 ‘난장이’ 시리즈를 썼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과 내용은 충분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또 그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는 우리 세대에게 전 세대의 행동 양식을 적용시키는 것처럼 무식한 처사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왜냐면 그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변한 게 아니라, 소설이 처한 환경이 변한 것처럼.
소설이란(이제 막 시작한 내가 느끼기에) 철저히 논리의 산물이고 노동의 산물이 아니던가. 그건 또 집중력의 산물이 아니던가. 환경의 산물이 아니던가. 점심시간 공원에서 글을 쓰던 선배 작가의 신화를, 내 많은 동료들에게 적용하기엔 우리 사회와 우리 시장이 너무 각박하고 야속해졌다. 그 누구도 내 동료들을 찬찬히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이지 운이 좋은 놈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벌이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병치레를 하지도 않으셨다. 환경이 네 소설을 만들었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반론을 펴지 못하겠다. 내 환경이 S와 P선배, N후배와 같았다면 나 역시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창작후기’란 별 게 없다. 소설은 기다리면 찾아온다.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얼마나 소설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느냐,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의 싸움이다. 그건 철저한 리얼리즘의 세계이다. 그러니 그런 점에서 나는 늘 미안했다. 나보다 더 문재가 출중했던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이건 정직한 경쟁이 아니다. 그런 부채감에서 나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반칙의 시작을, 반칙으로 마무리하지 않으려 허리를 더 곧추 세우는 길밖에. 그것이 내가 가진,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재야의 고수들에 대한 예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