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1967) 시인의 작품 가운데 애송시 후보를 꼽으라면,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는 시 '행복' 을 떠올릴 독자도 있겠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편지의 고수(高手)였다.
일본 유학시절,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후일 그 소녀와의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화동(花童)이 먼 훗날 '꽃'의 시인으로 유명해진 김춘수였다.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보냈던 편지들은 책으로 묶이기도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나,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그리움')와 같은 절절한 연시들은 바로 사랑의 편지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사랑의 시인' 과는 사뭇 다른,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 의 면모 가 유치환의 진면목에 더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의 서' 는 유치환 시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생명이 부대끼는 병든 상태에서 무생명의 공간, 바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 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사멸·영겁·허적 등의 관념적 시어가 사막의 무생명성을 강조한다.
또한 열사의 끝 그 '영겁의 허적' 속에 '호올로' 맞는 고독이 열렬하다는 것,
생명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회한 없는 백골'이 될 때까지 배우겠다는 것에서도 생명에의 역설은 두드러진다.
모든 생명의 본연은 무(無)다. 생명의 시작은 죽음의 끝과 이어져 있다.
그러기에 사멸의 땅 사막에서 근원적 생명을 배우려는 것이리라.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이 새겨진 사막의 적막,
그 열렬한 고독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단독자(憺者)가 있다.
물 한 줄기 찾을 수 없는 사멸의 사막 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 지고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생명의 '서(書)'에는 생명이 충만한 삶의 서(序) 와 서(誓)뿐만 아니라 경전의 의미까지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도 인간의 의지 혹은 정신적 높이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생명파 시인' 이라 부르는 까닭이고 '사막' 하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 까닭이다.
-해설. 정끝별·시인 2008.03.25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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