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침
- 청마 유 치 환
깊은 잠결의 어느 겨를에 생겼음인지 한결같이 울려오는 낭랑한
먼 다듬이 소리는 한 홰 두 홰 간곡히 외치는 닭 울음 소리로 더불어
겨우 짐작할 수 있는 새벽의 가차워옴에 따라 점점 맑아질 따름이었다.
열 사흘 달은 어느덧 서쪽 대밭 위에 기울고
마을은 집집이 지닌 한량없이 아늑한 제 그늘에 가리어
누리는 늘어진 안식도 이미 몇 고비를 무르익은 무렵 차라리 먼
암자의 인경 소리는 겨을한 중(僧)의 선하품과 시금한 눈시울의 여운을
늘어뜨려오건만 어느 마을방 어둑한 등잔 아래 초롱초롱 맑은 눈매와
단정한 앉음새로 홀로 일어 깨우치는 이 여인의 다듬이 소리는 물 같은
밤 고요의 온갖에 울림하여 남김없는 그 대기(大氣)의 무늬는 드디어
깊이 잠든 먼 별들까지 즐거운 선율로 눈뜨이고 다시 몇 억만 광년을
인과불멸(因果不滅)의 법칙과도 같이 무궁으로 무궁으로 번지어갈지니
저 먼 동방의 향가새꽃빛 새벽을 부르며 부르며
깊은 잠결 속에 다듬이 소리를 듣게 된다.
어느 마을의 어둑한 등잔 불빛 아래 맑은 눈매를 한 여인이 단정하게 앉아 다듬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 다듬이 소리는 새벽을 부르고
있고 그 소리 때문에 화자의 정신 또한 점점 맑아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향가새꽃빛' 의 '새벽' 은 과연 어떤 것인가?
'향가새꽃' 은 엉겅퀴꽃의 별칭이다. 엉겅퀴꽃을 흔히 '향가시'
혹은 '향가새' 라고 한다. 엉겅퀴 꽃의 색깔은 자주색, 혹은 빨간색
이다. 동쪽 하늘에 아침이 오기 직전에 물드는 자줏빛의 새벽.
그것을 '향가새꽃빛 새벽' 이라고 하였다. 매우 정결하고 깨끗하다.
시인이 평생 절실하게 파고 들었던 삶이나 존재의 문제는 이처럼
정결한 자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혹자는 무책임한 자연으로의 회귀는 지식인의 역사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라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사회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시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원초적 생명의 모습은 바로 자연에 있는 것일게다.
'다듬이 소리'. 이 청각적 심상은 매우 역동적이다.
처음에 다듬이 소리는 '달 울음 소리'와 함께 화자의 잠을 깨우는 매개
였지만,
이 청각적 심상은 고요한 밤의 '온갖' 물상들에게 작용하고 더
나아가
'깊이 잠든 먼 별들' 에 까지 그 소리의 '선율'이 퍼지고 있다.
결국 화자는 이 '다듬이 소리'를 '인과불멸의 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둠을 물리치는 단정하고 맑은 여인의 다듬이 소리는 화자가 꿈꾸는
'새벽'을 불러낸다.
아직은 '먼 동방의', 그렇지만 언젠가는
와야 할 '향가새꽃빛 새벽을'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