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 승효상의 我記宅處 … 1

2011.09.14 16:14

arcadia 조회 수:993 추천:26




[승효상의 ‘我記宅處’] · 오늘은 ‘오늘 피는 꽃’ 바라보세요 … 1 - 5 회 … 2011-04-3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  





Roman Forum or Foro Romano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




  • 건축의 본질이 공간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인 공간을
    설명하는 일이 그 건축의 공간이
    특별하기 때문인데도, 대개는 그 감동을
    그 건축의 모양이나 크기 혹은 색채, 문양 같은 것을 통해 설명하곤 한다.

    이는 건축을 공간이 아니라 큰 조각 같은 시각적 오브제로 인식하는 것이니,

    결국 건축의 본질과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이 공간지각 능력은 예술적 기예나 공학적 지식처럼 훈련으로 습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아무래도 타고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지도를 보고 이를 평면의
    그림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를 삼차원의 공간구조로 읽어 실제처럼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에게 이 능력이
    모자라면 평면으로 그리는 설계도와
    실제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에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어 그가 백 번을 그려봐야 소용없는 일이 된다.



    이 공간지각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폐허지는 대단히 흥분되는 여행지다.

    공간탐험이 전제되는 이런 여행은 그 장소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건축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여행인데,
    공간지각이 뛰어난 이들은 폐허의 현장에 널려 있는 유적의 파편들을 통해
    폐허 자체의 풍경만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 본다는 것이다.
    특히 서양의 건축과 도시는 주로 석재로 만들어졌던 까닭에 수천 년이 지난 폐허라도 아직 많은 잔해가 있어,
    건축가라면 그 원래의 공간구조와 삶의 모습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약간의 설명만 보태면 일반인도 그 실제적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여서,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나 로마의 포로로마노 혹은 이집트의 수많은 신전은
    수천 년 전에 이미 폐허가 된 옛 장소지만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를 불러모으며 그 역사적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다.



    지난주 로마에 갔을 때다. 동행한 이가 로마제국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보고 싶다고 해 오래전에 방문했던 이곳을
    다시 가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현상을 보존하는 작업도 이곳저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일행에게 역사적 배경과 실체의 모습을 설명하며 다녔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감동이 이제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부서진 신전과 광장의
    돌기둥들, 석제 계단과 널브러진 조각 파편들을 근거로 복원한 옛 모습은

    박제였을 뿐이며 그 이상의 상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체적 삶도 없어 오로지 관광만 남아 있었으니
    내게는 이미 의미 없는 장소가 된 것이다.







    보령 성주사지.

    그때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
    이 있었다. 바로 우리 땅 보령에 있는
    성주사지의 폐허였다.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다. 처음 갔던 때가 십 년 전이었지만 그때 받은 깨달음은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웠다.



    백제시대에 창건한 후 통일신라에
    이르러 중창해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
    이 폐사지에는 오늘날에도
    오층석탑
    하나와 그보다 작은 삼층석탑 셋, 그리고 석등과 석불 등 유적이 있어 이곳이 폐사지임을 알린다.
    물론 모든 건축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유장한 산의 능선에 둘러싸인 이 폐사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그 까닭이 자연풍광이나
    남은 잔해가 주는 시각적 미학이 아니었다.
    바로 스산하기 짝이 없는 그 장소에서 원형의 환상과 폐허의 실체가 교차하면서 나타나며 깨달은 건축의 본질이요 숙명이었다.
    추측하면 천왕문과 석등, 탑, 법당 그리고 금당 등이 주축을 이루고 그 좌우에 여러 승방과 각종 전각이 있었고,
    공양간이나 고사 같은 부속채와 부도비들로 주변을 이루었을 게다.



    문헌에 의하면 전체가 천여 칸의 건물군이었으며 문도만도 2000명이 넘어,

    수도승들이 공양할 때면 그 쌀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를 흘렀다고 했던

    대사찰이었다. 어느 곳이든 불교적 수행의 치열함이 곳곳에 만연했었을 게다.
    그러나 부족한 나의 공간지각 능력은 여기에서 드디어 한계를 맞고 말았다.

    한 번으로 완성된 것도 아니었으며 여러 차례의 중창과 불사를 거쳤을 이 사찰의 공간구조를
    남아 있는 불과 몇 조각의 파편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황망해 가쁜 숨을 몰아 쉰 후,
    그 역사가 생명을 다하여 땅으로 스며 이루어진 현실의 폐허를 보았을 때, 비로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자부한 그 공간지각 능력은 부질없는 집착이었다. 보이는 것은 침묵의 세계였으며

    아마도 그게 이 절을 세운 목적이었다. 이 폐허는 쓸모없게 된 사찰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는, 보이지 않는 절이었던
    것이다.
    그게 참된 불교 아닌가.



    우리의 옛 건축은 주재료가 나무요 흙이었던 까닭에 폐허가 되면 그 건축은
    거의 완벽히 사라지고 만다.
    많은 파편이 지저분하게 남아 아직도 그 존재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서양의 폐허가 아니라,
    건축의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맑은 수묵화처럼 존재를 비움으로써 완결하는 폐허다.

    그게 바른 건축이요 그로써 진실이었다.



    - 중앙일보 [승효상의 ‘我記宅處’]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2011.04.30








    보령 ‘성주사지’















         

    폐허는 우리에게 겸손 요구한다  





    Pompeii Street Ruins












  • 폐허는 우리에게 겸손 요구한다




  • 조경가로서 토속적 풍경에 대해 영향력 있는 글들을 남겼던 미국의 존 B 잭슨은 ‘폐허의 필요성’이란 글에서
    “폐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근원을 제공하며, 우리로 하여금 무위의 상태로 들어가 그 일부로 느끼게 한다”고 했다.
    폐허지를 여행할 때면 언제나 내 머릿속에 맴도는 글귀다.



    나에게 건축과 도시는 무생물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완공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거주자의 삶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도시 역시 태어날 뿐이어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생물적 존재라고 여긴다.
    만약에 건축이나 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붕괴나 몰락을 의미한다고도 했다.
    극단적이지만 그
    완성의 존재체가 폐허라는 것이다. 그래서 폐허에 서면 나는 자못 비장해진다.

    온갖 삶이 꿈틀대던 역사의 현장에 서서 당대의 삶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일이 흥미롭기 그지없더라도
    그 상상이 끝난 뒤 눈앞에 펼쳐지는 폐허의 현실을
    다시 응시하는 일은,
    내가 건축의 본질을 겸손히 되물어야 함을 요구받는 일과 다르지 않다.
    특히 최고의 문명사회를 이뤘음에도 그 절정의 순간에서 붕괴돼 그 형해(形骸,뼈대)만 남은 폐허에서는 더욱 그러했고,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허탈에 빠졌다. 어떤 이유에서 세워지건 건축이나 도시는 결국 붕괴되기 마련이었다.




    폼페이(Pompeii ruins)가 그 대표적 보기였다.

    2000년 전의 이 폐허는 견고한 도시 구조를 갖추고 최고의 도시적 삶의 풍요를 구가하던 완벽한 도시였다.
    외곽의 농경지에서 풍부한 농산물이 공급됐고, 2만 명이 살 수 있는 쾌적한 크기의 성내에는
    신전과 공회당이 있는가 하면
    술집과 매음굴(賣淫窟)도 있었으며, 부잣집 바로 옆에 빈자가 살았다.

    시민의 위락을 위해 공연장·경마장·공중목욕탕 등이 즐비했고, 로마에서 오는
    휴양객을 맞이하는 거리에는 활력이 넘쳐 골목마다 늘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현대적 도시 개념으로도 완벽했다. 그러나 서기 79년, 그들 곁에 있어 늘 믿었던
    베수비오산(Vesuvius)이 폭발해 700년의 도시 역사가 순간적으로 멈춰
    버린 것이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으므로, 그래서 멸망했을 것이라고까지
    나는 여겼다.







    Teotihuacan 달의 피라미드에서 본 사자의 거리와 태양의 피라밋



    멕시코시 북쪽, 50㎞정도에 ‘신들의 도시’ 를 뜻하는 테오티와칸(Teotihuacan)
    이라는 폐허(고대 아즈텍문명의 유적지)가 있다.
    7세기께 멸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도시 중앙에는 너비가 100m나 되고 길이가 자그마치 5㎞가 넘는 직선의 길이 뻗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이 ‘죽은 자의 길’로 불리는 중심축 주변에는 북쪽 끝에 ‘달의 피라미드’, 동측에는 ‘태양의 피라미드’ 등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수도 없이 많은데, 폐허만으로도 그 장엄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무려 20만 명이 살았으리라고 짐작되는 이 도시를 누가 건설했는지,
    왜 멸망
    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제의성 짙은 공간 조직과 거대 구조물들,
    각종
    신전과 주거지들로 미뤄 당시 세계 최고의 종교와 문화의 도시였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보름달 오르는 밤,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가마에 태워 모든 이가 화려한 장식을 하고
    소리치고 노래하며 사자의 길을 행진해 달의 피라미드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그녀의 간을 꺼내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그 피로 그들의 영원무궁을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폐허만 남았으니, 그들이 목숨 바치며 믿었던 주술의 신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Angkor Wat, 앙코르 사원



    캄보디아(Cambodia)의 앙코르(Angkor).
    크메르제국(Khmer)의 수도로 11세기에 1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이미 인구로서 세계 최대였으며 그들이 이룬 문명과 예술 또한 불가사의한 수준이었다.
    메루산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고 이를 형상화해 둘러싸고 건설한 궁궐과 사원은
    그때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건축물보다 크고 아름답고 정교했다.
    그들은 그러나 중심은 취했어도 주변의 민심을 얻는 데는 실패해 이웃 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땅에 남은 이들은 마치 미개인과 다를 바 없는 원초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Machu Picchu, 마추픽추



    페루에 있는 안데스 산맥 속의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Inca site),
    마추픽추(Machu Picchu)도 그렇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높은 산 위에 왜 존재해야 했는지,
    어떻게 멸망했는지 어떤 단초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들이 세운 도시가
    종교와 문화, 정치와 안전, 생산과 소비를 위한 제반시설을 갖춘 완벽한 자족적 도시며,
    그래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리라고 단연코 믿었을 게다.
    이상도시를 꿈꾸며 완벽한 고립을 자초한 게 그들의 삶을 지속하지 못하게 했을까.



    나는 요즘, 일본의 참상에 대해 예민하다.
    현대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시스템을 자랑하던 일본이었다.
    그들의 슬픔에 대해 객관적인 것조차 죄스럽지만,

    이 미증유의 폐허는 우리에게 어떤 겸손을 또 요구할 것인가.

    잭슨은 그 글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역사는 중단함으로써 존재한다.”



    - 중앙일보 [승효상의 ‘我記宅處’]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2011.04.09








    Pompeii Forum with Vesuvius








    (upper) Pompeii Forum with Vesuvius

    (lower) The Last Day of Pompeii - Karl Briullov (1799~1852) 作
















         

    ‘사이프러스 숲’ 에 정기용 형을 누이고 싶다  


















  • 고 정기용씨 · ‘사이프러스 숲’에 정기용 형을 누이고 싶다








  • 건축가 고 정기용씨.

    지난 주말, 우리 시대 위대한 건축가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정기용. 건축이 가져야 되는 최우선의 가치가 공공성
    이며 그게 건축의 윤리임을 온몸으로 실천하다,
    기진하여 단명하고만 건축가였다. 나는 그분을 형이라 부르며 존경
    하고 따랐다.



    이십 년 넘도록 늘 같은 지대에 서 있는 것을 기뻐했고, 많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자랑했으며,
    이 시대 바른 건축을 위해 우리의 가난한 의기를 곧잘 투합시켰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여행길에 같이 올랐다.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는 삶의 풍경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로 준비 때부터 항상 설렜고, 마치면 큰 위안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도,
    여러 곳에 있는 죽음의 형식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각별했다.



    프랑스의 남쪽, 세트를 들러 산등성이에 있는 해변의 묘지 속에서 폴 발레리를 찾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는 그의 시구를 기억하며 좋아했고,
    지중해 속에서 숨을 거둔 르 코르뷔지에가 스스로 그린 묘비를 찾기 위해 지중해변 마을 카프마르텡을 감격하며 뒤졌다.
    이탈리아에 가서는 베네치아 묘지의 섬 산미켈레 속을 산책하며 베네치아인들이 안식하는 방법을 확인했으며,
    모데나에
    올라가서 알도 로시가 세운 산카달도 공동묘지를 찾아 죽은 자들이 이룬

    도시의 풍경이 산 자들의 도시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서로 논의했다.



    우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이프러스 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두른 곳이면
    으레 묘지인줄 알았고,
    내려서 그 풍경 속을 거닐었다. 새로이 방문하는 도시에서는 일상의 삶을 위한 공간을 탐닉한 후에는
    반드시 그들이 죽어 만든 풍경을 찾아 나섰다. 그들의 마을에는 죽은 자의 마을이 늘 가까이 있었고,
    그 구성은 산 자의 마을을 축약하거나 번안한 것이 대부분임을 확인했다.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묘역을 보며 오래된 유대의 마을을 자연스레 연상했고,
    그게 베를린에 피터 아이젠만이 만든 홀로코스트 기념물과 닮았음을 알고 웃었다.



    스위스 티치노 지방의 이라냐에 놓인 작은 묘원에서는 지극히 아름다운 침묵을 발견한 후,
    그들의 마을이 그 연장에 있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 마을의 어귀마저 경건해 보였다.
    알프스의 마을 쿠르의 공동묘지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평화를 목도했다.
    그래서 독일어로 묘지는 평화의 마을을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스톡홀름에 있는 우드랜드 공동묘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옹고집쟁이 건축가 시구드 레베렌츠의 건축적 서사로 이루어진 그 죽은 자의 세계는,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성서적 풍경이었으며,
    그래서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우리는 우리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내 정기용 선생과 나는 우리들이 가진
    죽음의 풍경에 좌절했다.
    집값의 하락만을 걱정하는 천박한 물신주의는 죽음의 형식을 우리 주변에서 내쫓아 우리의 도시에서 경건은
    눈에 찾고 보아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했다.
    저 멀리 외진 곳으로 몰린 묘지들은 하나처럼 기괴한 돌 장식으로 범벅이 되어 그 천박함에 절망했다.



    그래서 선생은 화장을 하라고 하셨고 고향에 뿌려지기를 원했을 게다.
    그러나 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간 벽제화장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역 대합실 같은 사나운 분위기에, 몰지각한 선전벽보에, 인간미 없는 안내방송에,
    게다가 염불소리·목탁소리·찬송가소리·기도소리…. 아아, 울음과 슬픔마저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예의 없는 화장장은 죽음마저 희화(戱畵)화했으니, 갑자기 선생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엄습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선생의 유분을 모시는 납골묘의 현장에 가서 그 저질스러운 죽음의 형식을

    다시 보고는 차마 선생의 영정을 마주할 수 없었다.
    괴기스러운 석곽과 비석의 모양을 조금이라도 바꾸려 관리소에 문의했더니 규정위반이라고 했다.
    이렇게 작별하면 안 되는데… 형,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유홍준 교수와 건축가 김영섭 선생과 같이 돌아오는 길에 그 죄스러움을 자책하면서 이런 제안을 했다.
    혹시 우리 가까이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를 아름다운 죽음의 형식으로 다시 가꾸면 안 될까?
    그러고 보니 시대의 인사들이 거기에 묻혀 있는 것을 알았다.
    한용운을 비롯해 이중섭, 방정환, 조봉암, 지석영, 박인환, 오세창, 문일평, 이인성 그리고 안창호까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들을 다 대며 망우리를 문화재로 지정할 명분을 찾았다.
    안 그러면, 우리가 가진 못된 천민적 개발의식이 이 망우리마저 저 멀리 내쫓아버릴 몰염치의 가능성이 너무도 농후한 것이다.



    이미 역사가 된 이 장소부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은 자의 도시로 만들면 우리 죽음의 형식이 일거에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죽음이 늘 우리 속에 있어 우리의 삶이 오히려 아름다우며,
    그러므로 우리의 도시도 천박한 욕망에서 벗어나, 모여 사는 경건함을 그래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 중앙일보 [승효상의 ‘我記宅處’]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2011.03.19















         

    코르도바 골목길엔 시간의 윤기가 흐른다  


















  • 코르도바 골목길엔 시간의 윤기가 흐른다








  • 예컨대 처음 간 어떤 도시에서 세 시간 동안만 체재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디를 가야 할까?
    아마도 대개들 그 도시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나 장소를 갈 것이다.
    고대의 신전이나 왕궁
    혹은 기념탑이나 광장 등 여행안내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런 곳에 가서 확인하고 그 사실을 인증하기 위해 사진도 찍어야 한다.



    그런데 나라면 나는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

    그런 관광명소는 삶의 실체가 이미 떠났다는 이유로 내 여행의 관심사항에서 항상 후순위에 있다.
    대신 주어진 세 시간 동안 그곳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공간을 찾는다.
    별로 볼 만한 건축이 없더라도 그곳 사람들의 삶이 눅진히
    녹아 있는 거주지의 골목길 풍경에서 늘 큰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골목길의 풍경과 그들 삶에 대한 관찰을 제대로 하기란
    일정이 빠듯한 여행객으로서는 대단히 어렵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곳의 공간 구조를 미리 익혀두는 일인데,
    그렇게 되면 순간적인 풍경을 보더라도 그 풍경의
    배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의 지도를 구해서 들여다 보고 그 도시 구조를 읽어내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되도록이면 다른 종류의 지도들을 모으는데, 시대별로도 구분된 게 있으면

    최선이다. 지도에는 수없이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산세와 물길들의 분포,
    길의 구성과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뿐 아니라 권력과 재력 혹은 종교와 이념에 의해
    도시가 탄생하고 그 구조가 변화한 모습도 지도를 보면 유추해 낼 수 있다.

    여기에 공간적 상상력과 문화적 해석력을 동원할 수 있으면 이미 나는 지도의 도시 속에서 거닐고 있게 된다.
    도시 구조를 파악하고 그 도시의 사연을 들으면서 그곳 풍경은 이내 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되어,
    처음 가는 곳이라도 안내자 없이 그 도시의 거주자처럼 산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는 다른 이들을 어렵지 않게 안내까지 할 수 있다. 같이 간 이들에게, 나도 그곳이 처음이라고 하면 도무지 믿지들 않는 눈치다.



    그러나 지도에서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도는 위에서 보는 그림
    일 수밖에 없어
    땅을 디디고 사는 거주인의 삶을 같은 위치에서 볼 수 없다.

    유명한 건물이나 유적지는 설혹 거기에 서 보지 않아도 이미 많은 정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지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른 삶의 실체적 풍경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지도 속에 나타난 마을 구조를 머리에 넣고도 그 길에 서면,
    나는 그들 삶이 만드는 일상의
    예기치 못한 풍경에 의해 새롭게 감동을 받는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남부도시 코르도바에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Mosque)를 뜻하는

    메스키타(Mezquita)라고 부르는 역사적 건축이 있다.
    코르도바의 상징이 되어 수없이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이 건축은 8세기에 이슬람사원으로 애초에 지어졌다가
    기독교문화가 지배한 이후에는 교회로 바꿔 사용해 왔다.

    그 규모도 대단히 크지만 엄정하게 배열된 팔백오십여섯 개의 기둥들 사이에 들어오는 빛으로 빚는 내부 공간은 절제미의 극치를 보인다.



    - 중앙일보 [승효상의 ‘我記宅處’]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2011.02.26















         

    건축, 난 여행에서 배운다  


















  • 건축, 난 여행에서 배운다




  • 이곳저곳 여행을 통해 타인의 실체적 삶을 만나죠

    그 풍경들은 설계의 기반이 됩니다








    승효상 건축가 ·
    이로재(履露齊) 대표


    요즘은 건축대학이나 건축학부로 건축 교육이 독립된
    대학교가 많이 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축은 공과대학이나 미술대학의 일개 학과에 속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게 우리 사회가 건축을 공학이나 예술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직도 이 사회적 인식의 상황은 여전하다. 이는 우리가 다분히 시각적 대상으로 건축을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크다거나 작다거나
    모양이 예쁘다거나 하는 이런 수준의 이해로는 건축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건축은 어떻게 보아야 그 본질을 알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공간의 조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외관이란 내부 공간을 감싼 결과일 뿐이어서 부차적인 것이다. 그 공간의 조직이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집의 거실과 주방·침실 등을 얼마만큼 크게 하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사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건축설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공학은 그 공간의 조직이 실현되도록 뒷받침한 기술이며,
    미술로 보는 것은 그 공간을 감싼 겉가죽을 조형물로 느낀 결과라, 이 모두가 건축의 일부분적 속성일 따름이지 건축의 본질이 아니다.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우리를
    만든다.”
    즉,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말이다. 예컨대 부부가 오래 살면 닮게 된다는 말도
    그 이유를 따지면, 다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한 공간에
    같이 살게 되면서
    그 공간의 규율을 따르고 적응하게 되어 같은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사고가 같아지고 급기야는 얼굴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가능하다. 좋은 집에서 살면 좋은 삶이 되기 마련이고
    나쁜 집에서 살면 그 삶은 나빠진다.



    건축 설계라는 일이 남의 삶을 조직해 주는 것인 만큼, 건축가가 좋은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한 관심의 토대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바른 건축 공부란 우리 삶의 형식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남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문학과 영화 등을 보고 익혀야 하며,
    과거에 어떻게 산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들추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를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하므로,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넣으려 하면 인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인문학의 공부는 대개 책으로 얻는 지식이어서 추론과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삶의 실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유효한 건축 공부 방법이 있으니 바로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삶이 이루는 실체적 풍경은,
    그 전부가 건축 설계의 구체적 결과요 주어진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여행의 기술』을 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현실에서 만나는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
    이라고 했지만, 그 견해에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말이 옳다면 여행은 도피 수단밖에 되지 않으며 일상을 증오로 몰 뿐이어서 불건전하다.



    내가 여행을 통해 얻는 첫 번째 유효함은 진실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축적되는 환상이 있다.
    저 멀리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사는 이들과 그들의 환경에 대해 읽고 들은 지식으로
    생긴 상상인데,
    이는 가공이라 거짓이기 쉬우며 그래서 힘이 없다. 특히
    건축은 현실의 땅을 디디고 선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현장에 서서
    그 건축의 실체를 보면서,
    내가 가졌던 환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다.
    바로 진실은 현장에 있고, 그 실체에는 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온 사람의 얼굴은 늘 광채를 띠게 된다.



    여행이 우리의 삶에 유효한 두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해 경계 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그 결과로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종파주의와 그릇된 편견과 헛된 애국심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별로 가진 것은 없어도 더없이 풍요롭게 보인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시간에 나는 이베리아의 평원을 지나는 여행길에 있을 것이다.
    환상과 실체 사이에 있는 간극의 크기를 또 절감하게 될 것이며,

    이방인이 된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초 이곳을 처음 방문하기 전, 이 건축이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 공간이 주는 감동 또한 대단해 오랜 시간이 걸려 이 먼 곳
    까지 온 나는 그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서주일 뿐이었다.

    그 사원을 나와 호텔로 가기 위해 골목길로 접어든 순간 전개되는 일상의 거리 풍경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골목길에는 예측 불가한 형태와 크기의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길가의 건축들은 시대적 풍상을 그대로 노출하며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본 넓은 길은 오백 년이 넘는 작은 교회당 앞의 길다란 광장이었고,
    끊어졌던 길은 기울어진 집의 일층으로 연결돼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을 이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그 길들은 시간이란 윤기로 빛났다.
    이천 년의 거리에 로마가 있었고 무어인들이
    있었으며 모슬렘과 유대인에 기독교도가 같이 있었다.
    길모퉁이에, 창가에,
    푯대에, 난간에… 이름 없는 디자인이며 건축이었지만 그 모든 단편이 진정한 코르도바였다.
    나는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골목길 속을 탐색하며 그 속에 기록된 수없이 많은 역사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삶이 완성한 건축의 아름다움, 그 일상의 미학을 만끽했다. 그렇다.
    여행이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얻는 삶에 대한 성찰임을 다시 알았다.



    - 중앙일보 [승효상의 ‘我記宅處’] 승효상 건축가 · 이로재 대표 201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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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 승효상 (承 孝 相)


    1952년생. 부산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공학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원/공학석사,
    비엔나공과대학
    (Technische Universitaet Wien, Austria)에서 수학했다.



    15년간의 김수근 문하를 거쳐 1989년 그 자신의 사무소인 ‘이로재 (履露霽,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란 뜻)’를
    개설한 그는 한국 건축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4.3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새로운 건축교육을 모색하고자 설립된
    서울건축학교의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빈자의 미학’ (1996)과
    ‘지혜의 도시/지혜의 건축’(1999) 등이 있으며
    1998년 북 런던대학 객원교수
    를 역임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20세기를 주도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빈자의 미학’ 이라는 주제를 그의 건축의 중심에 두고

    작업하고 있으며, 수졸당(1993), 수백당(1998), 웰콤시티(2000)등으로 여러 건축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파주출판 도시의 코디네이터로 새로운 도시 건설을 지휘하고 있는 그에게
    미국건축가 협회는 Honorary Fellowship을 수여 하였으며,
    2002년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그곳에 가고 싶다 · 안동, 비움의 자리, 사랑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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