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제단앞에 누워있다.
얼마전까지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찬송을 불렀는데
오늘은 하얀 국화송이 꽃밭에 홀로 누워있다.
1년여 투병의 흔적으로 검고 찰지던 머리가 벗겨진 것만 다를 뿐,
평안하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삶과 죽음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함께 무릎꿇었던 이 자리에서 그가 홀로 누운 저 자리까지 일까?
침묵의 바닥에서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는 저 하늘까지일까?
재상형과 처음 이 성당에서 함께 앉아 찬송을 불렀던 때가 “부부모임 (ME)”이었다.
십수년전, 내가 처음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에 글을 시작하던
무렵, 그는 훨씬 전 부터
명망있는 고정칼럼을 연재 중이었다. 글이 인연
이 되어 그가 다니던 성당에서 주관한
부부 주말 모임에 초대를 받았었다.
그 때 형네는 세쌍의 발표부부중 한팀이었는데,
우리 30여쌍 참가자들은
그들의 애환과 간증을 내 것처럼 느끼고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그가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를 상상하며 쓴 편지를 고개를 숙이고 읽던 모습이다.
배우자가 곁에 없음을 깨닫고나서야 비로소 후회하던 우리 남편들은 모두 몰염치한 공범자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몰염치하다. 그를 보낸 지금에서야 그와 나누었던 첫 정과
그가 베풀었던 은혜를 채 보답하지 못한 회한을 감당치 못하고 있다. 나를 처음 보던 날,
동란때 죽은 당신의 동생이 살아온 것
같다고 했는데.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관을 들어줄 사이라고 했는데.
지난 주엔 서울과 LA에서 ‘현대수필’과 ‘미주 수필동인지’가 배달되었다.
연초에 형과 함께 북가주를 대표해 보냈던 글들이 실려있다.
그 중에
그가 투병생활하며 썼던 작품에선 아직도 그의 따뜻한 심장소리가 들린다.
“실은 요 며칠 나는 심한 통증으로 밤마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정밀 검사에서 밝혀질 것이라는데 다른 때 같으면 상당히 걱정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불안함이 전처럼 심하지 않습니다. 처음 죽음을 느꼈을 때 착하게 살고싶은 욕망이 생기고,
삶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친구
말에 힘을 얻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말기환자 500여명들의 조언을 담은
“인생수업” 이란 책을 읽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되면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가볍게 신에게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던 심정이 보인다. 두려움이나 원망대신, 한마리 나비
처럼 겸허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창조주를 대면하려한 그의 기도가
들린다. 그의 평소 글들이
수채화처럼 담백했듯이 죽음을 바라보던 그의
심정도 아무 꾸밈이 없다.
문득 성가대에서 플룻선율에 얹어 부르는 ‘사랑으로’가 들린다. 비로소 슬픔에서
깨어난다. 십수년간, 행사때마다 우리가 듀엣으로 불렀던 애창곡이다.
그 옛날 부부모임에서 처음 시작했던 노래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여기서 다시 목이 메인다. 그의 관을 잡은 손이 떨린다.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진 그 자리에 씨앗이 심어지고 새 생명이 움튼다.
그리고
‘우리타는 가슴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른다’.
기사 글 : 2011.05.31 (화) / 미주 한국일보 | 김희봉 칼럼(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