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가 外 4 · 김희봉(수필가)

2011.08.22 07:10

유봉희 조회 수:764 추천:19




수필 · 광화문 연가 · 김희봉 칼럼 (수필가)

































  
광화문 연가










김희봉 칼럼 (수필가)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잊은지 오래였던 이문세가 어느날 북가주에 나타나 '광화문 연가'를 불렀다. 근 20년만이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옛날이 고스란이 되살아났다.
노래란 옛 추억을 한순간에 눈앞에 불러오는 타임머신의 위력을 가졌나보다.
어쩌면 노랫말 한소절로 수십년 돌덩이처럼 굳어진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리는지 모르겠다.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20대에 처음 보았던 아내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광화문은 내 젊음의 텃밭이었다. 지금은 십수 차선 횡뎅그레한 아스팔트
광장으로 변했지만,
그때 효자동행 전차를 타고 학교를 오르내릴 때만해도 광화문 네거리의 은행나무들은 푸르고 싱그러웠다.
화창한 토요일 방과후, 친구들과 경복궁 담을 끼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은 멋진 세상으로 뚫린
환한 중앙통이였다.



대학에 들어가 나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뼈대가 자랐다.

훗날 경실련을 창설해 시민운동을 주도한 S형이 대학부 리더였는데
우리는 모임이 끝나면 광화문 뒷골목의 다방과 막걸리집을 전전하며 끝없이 떠들고 고뇌했다.
그와는 공대 기숙사 룸메이트이기도 했는데 기계과 수석으로 들어간 수재가
기독학생 운동가로 변신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매일 혼동하고 흠모했었다.



아내를 만난 것도 광화문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미팅을 여왕봉 다방에서 미대생들과 했었다.
아르바이트에 쫓겨 표도 못샀던 나는 친구가 준
티켓을 들고 마실가듯 나갔다.
무슨 인연인지 아내도 남의 표를 들고 왔다고 했다. 선인장이 그려진 3번 티켓.
그날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나는 이 인연을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열변했다.
아내는 조용히
웃으며 들어주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예배당../”



그때 아내는 부모님들과 함께 나가는 남산밑 조그만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했었는데
나는 친구패들을 데리고 매 수요일 저녁예배때 마다 출근했었다.
유복하고 착실하게 자란 아내는 나같은 떠돌이가 나다니는 큰 세상을 동경
했고,
대학 때부터 기숙사로 전전하던 나는 작고 아늑한 남산밑 교회당같은 가정을 꿈꾸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미국 유학을 오면서 광화문에 우리들의 젊음을 고스란히 놓고왔다.
그리고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믿고 살았다.



어제 밤엔 우디 엘렌이 만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스”를 아내와 보았다.

현실에 적응 못하는 한 젊은 작가가 꿈을 찾아 파리에 왔다.
그는 자정 마다 성당앞을 지나는 자동차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다.
20년대 파리에서 젊음을 보냈던 헤밍웨이, 피카소, 쟝 콕토들과 교우한다.
감격한 그는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우상들도 역시 자기 세대에 만족치 못하고 더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알게된다.
어느 세대건 공허한 옛 꿈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걸 깨달은 젊은이는 더 이상 옛날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의 꿈을 찾기로 결심한다.



내게도 세월따라 떠난 줄 알았던 옛날이 노래 한마디에 실려 다시 돌아오고 있다. 옛 광화문의 추억이 있어 행복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방땅에서
가족들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오늘도 내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임에 틀림없다.
나이들며 자꾸 주눅드는 나를 다둑여주는 아내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할
내일도 소중하다.
옛날이 생각나면 가끔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이 곳에서 한평생 살기로 한다.





※ 글: 김희봉 칼럼 (수필가 · 미주 한국일보) | 2011-07-30 (토)












  
인간의 자격









김희봉 칼럼 (수필가 · 미주 한국일보) 







 
인간의 자격

















'남자의 자격'이란 한국 TV 프로가 인기다. 훌륭한 남자가 갖춰야할 자격을 말하는 줄 알고 보았다. 그런데 구성이 좀 다르다.
남자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모아 인기 연예인들이 함께 체험하는 프로로 꾸며졌다.

일종의 한국식 '버켓 리스트'인 셈이다.



이제는 '남격'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전 국민적 예능 프로의 최근 하이라이트는 합창무대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혼혈 여지휘자아래 수개월간 뼈를 깎는 고난도 연습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그리고 전국 합창경연무대에서 프로보다 멋진 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나도 70여명되는 합창단을 7년 간 이끌어보아 그 연습과정의 어려움을 잘안다.
3년 전에 암으로 세상떠난 의사 김종대 형과 북가주에서 '자선합창단'을 함께 운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창설동기가 '인간의 자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합창에 남다른 애착, 추진력 넘치는 리더쉽과 함께 희생적인 심성을 지녔던 그는 이민와서
중장년의 고비를 넘어가는 우리 한인일세 들이 죽기전에 꼭 함께 해야할 가치있는 일로 합창을 꼽았다.



그의 권유로 한국말 소통이 유창했던 미국인 민기만 음악목사와 소프라노

백효정씨가 지휘자로 합류, 매주 강도높은 훈련을 쌓았다.
그리고 연말이면 북가주가 떠들썩하게 합창제를 열었다.
그 세월 동안 우리 평범한 이민자들은 고품격의 성가와 명곡들을 마음 껏 배우고 부를수 있어서 행복했고,
이웃들이 뜨거운 가슴을 열고 들어주어서 고마왔다.
그리고 7년여 동안 홈리스 센터나 푸드뱅크 같은 불우이웃들과 선교지에 30여만불이나 기부하는 분에 넘치는 자선사업도 했다.



모든 일이 때가 있고, 인재가 있어야하는 게 틀림없다. 김종대 형이 떠나고 난 뒤 나도 후진으로 물러섰다.
후배들이 물려받은 합창단은 오랫동안 휴면중이다.
우리 인생사가 TV프로처럼 멋진 한판 승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야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참 '남자의 자격'은 이럴 때 나타나는 것일텐데 창립 단장이었던 내가 뒷받침을 못하니 자격미달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남자의 자격'에 미달이란 생각은 오래전 부터 해오던 터이다.

우선 남편으로서의 자격에 의심이 들기 시작된 게 돈버는 능력 때문이었다.
사실 자격(資格)의 자(資)자도 조개 패(貝)가 달려 재력을 뜻하지 않는가.

돈이 있어야 남편구실도 할 수 있다는 말일텐데
아내는 나같은 월급장이에게 시집와 항상 쪼들리며 살았다. 아들 자격도 미달이다.
이십여년 전, LA에서 자리잡는 동생가족들의 애기들을 보겠다고 내려가신 어머니가 이젠 팔순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못모시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자격도 그렇다. 어느새 제힘으로 다 커 버린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언제 부터인가 내가 살아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년내 은퇴를 앞둔 탓이기도 하다.
어쩌면 온당한 '남자의 자격'에 승부 한번 걸고 싶은 잠재의식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이모작을 생각했다.



한의 대학원에 등록한지 2년차가 되었다. 풀타임 직장일을 하면서 학업을 하자니 힘에 부친다.
그러나 은퇴를 하면 의료 선교팀이나 '국경없는 엔지니어팀'과 함께 어려운 세상에 나갈 꿈을 꾼다.
낮엔 우물을 파주고, 밤엔 침을 놓아주면서 사는 삶의 그림을 그린다.
내 스스로에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고 싶은 염원인지도 모른다.





※ 글: 미주 한국일보의 김희봉 칼럼 | 2011-08-12 (금)













  
햇살 한 줌에도 여름은 가는데









김희봉 칼럼 (수필가 · 미주 한국일보) 







 
햇살 한 줌에도 여름은 가는데

















8월의 햇살에 티 한점 없다. 눈부신 햇빛을 올려다보니 마치 수만(數萬)

점 희고 붉은 유채색 꽃잎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다.
눈보라가 겨울의 숨결이라면 이 화사한 햇살의 꽃보라는 여름하늘이 내리는 강복(降福)의
손길같다.
햇보라 속에 온 몸을 담근 채 유유히 날아오르고 싶다.



햇살이 꽃잎처럼 여겨지는 것은 두보의 시 <곡강(曲江)>때문이다.

“꽃잎 한 점에도 봄이 가는데/ 바람에 만 점 꽃잎이 진다.”

시인은 떠나가는 봄을 못내 아쉬어한다.
흘러가는 세월을 애타게 붙들고
싶다. 낙화 한 점에도 봄이 가는데,
수만 점 흩어지는 저 꽃잎 속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들이 덧없이 흘러가는가하는 탄식이다.
이 싯구가 지난 봄 서둘러 세상 떠난 문우를 배웅하고 난 뒤 마음 한 구석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봄을 여의고, 8월의 하늘을 보면서도 아직 그 싯구에 매달려 있다.
“아! 햇살 한 줌에도 여름은 가는데/ 바람에 만 점 햇보라가 흩어진다.”



오랫만에 저녁 글모임 후 돌아가는 길에 선배님이 텃밭에서 길렀다고 상추
보따리를 건네 주셨다.
집에 와서 보니 여린 상추를 차곡차곡 재어 깔끔한
통에 담으셨다. 족히 몇백장은 될 듯 한데 정성들여 쌓기도 하셨다.
아마도 두 내외께서 한 여름 내내 키운 상추를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풍성히 주신 것 같다.



상추가 입안에서 아삭아삭하다. 잎과 잎사이에 물을 살짝 얼려 포개셨는지 며칠 후에 먹어도 신선하다.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감이 세포속까지 밀려든다. 그러면서 선배님 부부께 우리들은 아무 것도 먼저 해드리지 못한 게
부끄럽다.



선배님은 한국에선 문학도였다. 그런데 미국 오셔선 만학으로 공대를 졸업
하고 토목기술사가 되셨다.
주정부 토양실험실 책임자로 오래 계셨는데
어느 날엔가 지나가는 얘기처럼 하셨다.
“내가 뽑은 신입들 중에 실력이
모자라 진급누락을 시킨 녀석이 나를 고소한 적이 있었소.
상급자인 내 영어에 하자가 있어 자기가 탈락됐다는 주장이었지.
결국 내가 이겼지만, 그 사건을 치루면서 이민 일세가 이방 땅에서 받는 모멸감을 온 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었소.
어찌 생각하면 참 쓸쓸한 세월이야”



미국 직장을 수십년 다닌 나는 선배님의 속내가 어땠는지 잘 안다.
아무리
오랜 세월 지나도 내가 하는 미국말엔 고향의 억센 억양이 박혀있고, 급하면 앞뒤가 어긋난 한국식 영어가 튀어나온다.
어눌하게 표현된 내 참신한 복안보다 매끄러운 토박이들의 혀로 묘사된 진부한 안이 선택될 때마다 엄습하는 자괴감.
리더의 자리에 서서도 서양인들만의 이심전심 적인 대화에서 소외되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힘겨웠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그리워서 내가 은퇴를 서둘렀는지도 모르오.
물론
평생 직장덕에 자식들 공부시켰지만 내가 아닌 나를 산 세월이었던 듯 싶소.
지금은 모국어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사색도 하고, 게다가 내 아버지를 닮은 팔자걸음도 걷고 사니 나를 찾은 것 같아”



선배님은 말이 통하고 나눌 사람이 그리워서 텃밭에서 봄 종일 상추를 가꾸셨던 것이다.
꽃잎 한 점에도 봄이 가는데, 햇살 한 줌에도 여름은 가는데,

무작정 흘러가는 세월이 아까와 오늘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상추를 따셨울 것이다.
그리고 한잎 한잎 켜켜이 그리움의 정을 재어 담으셨을 것이다.





※ 글: 미주 한국일보의 김희봉 칼럼 - 2011-08































 
4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



박목월 선생의 ‘4월의 시’ 를 노래처럼 읊조린다. 3월 내내 흩뿌리던
찬비가 그치고 바야흐로 봄하늘이 열렸다.
마당 한 가운데 서니 넉넉히 자란 자목련 나무에 꽃송이들이 활짝 피었다. 마치 초파일 등불같다.
연보랏빛 꽃살을 아기 볼인양 어루만지며 오랜 외출에서 돌아온 봄을 반긴다.



‘4월은 생명의 등불’ 이란 귀절을 소리내어 낭송해본다. 냉이 맛같은 산천 기운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오랜 세월 익숙한 시인데도 오늘 아침엔 유독 나를 위해 아내가 막 끓여준 나물국 같다.
한해의 첫 4반기를 엉거주춤
보냈음에도 4월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와 준게 고맙다.

내 삶에 생명력을 다시 불어 넣어야겠다는 결심을 등불처럼 켠다.



이런 생각은 지난 주에 들은 H교수의 동양의학 원론 강의 덕인 듯 하다.
그는 보기드문 태양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발한 생각이 가득 찬 탓인지 유달리 머리가 크고 안광이 형형하다.
생각이 혀를 앞지르는 탓에 가끔
말을 더듬는데 강론은 대하처럼 거침이 없다. 그는 4월 첫 강의날 칠판에 가죽, 혁(革)자를 크게 썼다.



혁(革)자는 짐승의 껍데기를 홀딱 벗긴 가죽이란 뜻이다. 그래서
혁신(革新)이나 개혁은 환골탈태, 이노베이션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을
자세히 보면, 날개를 편 새모양도 닮았다. 그는 솔개의 우화를 소개했다.

솔개가 70살 까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40쯤에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사냥에 무디어진 부리와 발톱을 바위 틈에 넣고 깨부수어
새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 수명을 더 누린다는 것이다. 이는 조류의 생태적 설명이라기보다

과감한 희생을 통한 혁신만이 살길이란 뜻을 담은 우화일 것이다.



그는 코끼리 이야기도 하였다. 야생 코끼리는 60-70년 산다고 한다.

모계사회를 이루는 코끼리 떼는 수십마리가 한 무리를 짓고 살면서 나뭇잎과 과일들을 하루 300kg나 소화한다고 한다.
그리고 코끼리는 죽을 때를 알아 그 때가 오면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아무도 모르는 장지를 향한다고 한다.
그런데 코끼리가 죽을 때는 입속에 난 어금니가 다 닳아 굶어죽는 때란 것이다.
이를 간파한 수의사가 새 의치를 박아주었더니 3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을 대폭 늘린 것은 물의 소독이었다.

18-19세기 때 병원체에 감염된 물 때문에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의
창궐로 인간수명은 30-40살 남짓했다.
지금은 위생적 환경과 식생활 개선등으로 수명이 2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스트레스가 주요인이라는 암과 같은 질병들 때문에 수명연장에 급진전을 못보고 있다.



앞으로 획기적인 인간의 수명 연장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줄기세포로 키운 장기(臟器)로 병든 장기를 대체하는 생명공학술이나

암세포를 추적, 치유하는 나노기술이 그 해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H교수는 인간들이 끊임없는 자기개혁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고,
정신을 바로 세워 마음과 육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 더 순리적이란 가르침을 준다.
철이 바뀔때 마다 내 껍데기와 허물을 벗겨가는 노력이 생명의 등불을 밝히는 길이란 뜻일게다.



4월은 그동안 남에게 상처만 주었던 나의 모진 부리와 손톱,
그리고
남을 씹기만 했던 잇발까지 갈아치는 환골탈태의 달이다.

이 계절에 껍데기를 벗고 혁신하길 소원한다.



- 수필가 김희봉 | 한국일보 (San Francisco) 2011-04-05









 

2월의 마음






" ‘벌써’라는 말이 2월 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가지
  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있는 그 자리에/ 어느 덧 벙글고 있는 꽃..”



오세영 시인의 ‘2월’ 이란 시를 읽다가 아니 벌써 2월인가 하고 화들짝
놀란다.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의 속도감에 주눅이 들어 마지못해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2월이다.
이 나이가 되어도 늘 지각하는
아이처럼 허겁지겁 세월에 쫓겨 달려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오늘은 시인의 권유를 듣기로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레 텅 비었을 것이라고 버려두었던 내 삶의 뜰로 나서기로 한다.

그곳에서 어느 새 벙글고 있는 매화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꽃에게 어떻게 세월과 벗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한다.



마음을 추스리니 문득 “잃어버린 조각” 이란 실버스타인의 동화가 생각난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 잃어버린 귀퉁이를 찾아 동그라미는 길을 나섰다. 내 잃어버린 조각은 어디 있나요?
눈과 비를 헤치며 헤멨지만 조각이 떨어져 빨리 구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구르다가 멈춰서서 벌레와 대화도 나누고, 길가에 핀 꽃냄새를 맡기도 했다.



오랜 여정끝에 몸에 꼭 맞는 조각을 만났다. 이젠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었다. 예전 보다 몇 배 더 빠르고 쉽게 구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구르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꽃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풍덩이도 잠자리도 지나쳤다.
어느날, 동그라미는 구르기를 멈추었다. 찾았던 조각을
살짝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귀퉁이 없이 천천히 굴러가며 노래했다.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요” .
나비 한마리가 동그라미의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그래.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 더 중요한 것아닌가. 좀 늦게 가면
어떤가.
좀 뒤쳐져도 우리들 삶의 방향만 바로 서 있다면 언젠가는 목표에 다다르는게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마당에 매화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아직 새순이 돋지 않았지만 결코 서두르지않는다. 가지의 방향이 옳으므로 어느날 벙긋 웃음을 머금고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겐 왜 그 믿음이 없는가? 어딜 향해 허겁지겁 쫓아가는가?

“한국인은 자신을 다른 사회구성원과 끊임없이 비교해 남을 이기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생각한다” 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남을 이기려면 한발짝이라도 빨리 달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유전자속에도 박혀있는것 같다.



작년 말, 몇해 후면 닥아올 은퇴를 앞두고 야간 대학원에 등록을 했다.

선교여행도 하고 이웃도 돌보는 봉사의 삶으로 방향을 잡아놓고 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사오년 느긋하게 즐기며 공부하려는 초심이 사라져간다. 서둘러 마치려는 욕심에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깜짝 놀란다.



속도라는 가시적인 현상에 삶의 방향의 본질을 잃어가는 내 마음을
시인은 어쩌면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시의 결구를 음미한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 라는 말이 2월 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환경과 삶 | 수필가 김희봉 | 한국일보(San Francisco) | 2011-02-08




















솔잎하나 떨어지면 …





김희봉 (수필가)








 그가 제단앞에 누워있다.

 얼마전까지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찬송을 불렀는데

 오늘은 하얀 국화송이 꽃밭에 홀로 누워있다.

 1년여 투병의 흔적으로 검고 찰지던 머리가 벗겨진 것만 다를 뿐,

 평안하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삶과 죽음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함께 무릎꿇었던 이 자리에서 그가 홀로 누운 저 자리까지 일까?

침묵의 바닥에서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는 저 하늘까지일까?



재상형과 처음 이 성당에서 함께 앉아 찬송을 불렀던 때가 “부부모임 (ME)”이었다.
십수년전, 내가 처음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에 글을 시작하던
무렵, 그는 훨씬 전 부터
명망있는 고정칼럼을 연재 중이었다. 글이 인연
이 되어 그가 다니던 성당에서 주관한
부부 주말 모임에 초대를 받았었다.
그 때 형네는 세쌍의 발표부부중 한팀이었는데,
우리 30여쌍 참가자들은
그들의 애환과 간증을 내 것처럼 느끼고 공감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그가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를 상상하며 쓴 편지를 고개를 숙이고 읽던 모습이다.
배우자가 곁에 없음을 깨닫고나서야 비로소 후회하던 우리 남편들은 모두 몰염치한 공범자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몰염치하다. 그를 보낸 지금에서야 그와 나누었던 첫 정과
그가 베풀었던 은혜를 채 보답하지 못한 회한을 감당치 못하고 있다. 나를 처음 보던 날,
동란때 죽은 당신의 동생이 살아온 것
같다고 했는데.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관을 들어줄 사이라고 했는데.



지난 주엔 서울과 LA에서 ‘현대수필’과 ‘미주 수필동인지’가 배달되었다.

연초에 형과 함께 북가주를 대표해 보냈던 글들이 실려있다.
그 중에
그가 투병생활하며 썼던 작품에선 아직도 그의 따뜻한 심장소리가 들린다.



“실은 요 며칠 나는 심한 통증으로 밤마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정밀 검사에서 밝혀질 것이라는데 다른 때 같으면 상당히 걱정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불안함이 전처럼 심하지 않습니다. 처음 죽음을 느꼈을 때 착하게 살고싶은 욕망이 생기고,
삶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친구
말에 힘을 얻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말기환자 500여명들의 조언을 담은

“인생수업” 이란 책을 읽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되면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가볍게 신에게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던 심정이 보인다. 두려움이나 원망대신, 한마리 나비
처럼 겸허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창조주를 대면하려한 그의 기도가
들린다. 그의 평소 글들이
수채화처럼 담백했듯이 죽음을 바라보던 그의
심정도 아무 꾸밈이 없다.



문득 성가대에서 플룻선율에 얹어 부르는 ‘사랑으로’가 들린다. 비로소 슬픔에서
깨어난다. 십수년간, 행사때마다 우리가 듀엣으로 불렀던 애창곡이다.
그 옛날 부부모임에서 처음 시작했던 노래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여기서 다시 목이 메인다. 그의 관을 잡은 손이 떨린다.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진 그 자리에 씨앗이 심어지고 새 생명이 움튼다.
그리고
‘우리타는 가슴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른다’.



기사 글 : 2011.05.31 (화) / 미주 한국일보 | 김희봉 칼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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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한 컷의 과학] 지구는 또 있을까 ~ 노벨상 1 - 15 回 arcadia 2015.06.14 18335
공지 음악, 나의 위안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arcadia 2015.06.03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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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용재 오닐의 슬픈노래 中 ‘장미와 버드나무’ arcadia 2015.05.03 3428
공지 모차르트 ‘편지 이중창’ - 산들바람의 노래 arcadia 2015.04.28 3163
공지 '음악이 있는 아침' - Alice Sara Ott plays Chopin arcadia 2015.03.29 1462
공지 TV문학관 메밀꽃필무렵 - 이효석 arcadia 2015.03.26 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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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겨울왕국 - Frozen - Let It Go 유봉희 2014.05.01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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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시인들이뽑는시인상'수상(유봉희·한기팔) [1] 유봉희 2014.09.25 846
공지 2014 '시인들이뽑는시인상' 시상식장에서 - 유봉희 유봉희 2014.12.13 1843
공지 슈만 - 여름날의 평화 (Sommerruh ) [1] ivoire 2011.06.03 2444
공지 Steinbeck Center / Berkeley Literature [1] 유봉희 2010.07.23 3505
공지 윤동주 문학의 밤 - 버클리 문인들 [1] 유봉희 2009.09.08 1667
공지 Fine Art Exhibition · 유제경 展 [2] 유봉희 2009.06.17 9461
공지 MOM's Paintings / 어머니의 오솔길 · 유봉희 [1] 유봉희 2009.04.20 2338
공지 Wallnut's Spring / Ducks & Egg Hunting'09 [1] 유봉희 2009.04.15 1303
공지 인생덕목 (人生德目) /김수환 추기경 말씀 [1] 양승희 2009.02.27 1430
공지 Bear Creek Trail [1] 유봉희 2008.12.30 1689
공지 Earth and Environment arcadia 2009.01.06 1503
공지 산와킨강 · San Joaquin River-&-Wallnut [1] 유봉희 2008.10.25 1857
공지 [KBS 시가 있는 음악세계] 소금화석 [1] Amellia 2007.06.07 1904
공지 내 별에 가다 [1] 박영호 2006.09.30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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