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시대적인 곡절을 담고있는 비운의 노래이다.
본래 이 곡의 노래말은 한국문단의 중요한 시인인 정지용의 고향이란 시이다.
암울했던 제국시대를 몸부림치며 민족음악가로서 족적을 남긴 채동선이 이 시에 곡을 붙였다.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애환을 깊은 서정에 담아 오랫동안 나라 잃은 민족의 설음을 달래주던 노래였다.
1933년 일제 식민시절에 작곡된 이 곡은, 당시 동경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그의 누이가 자신의 독창회 때
초연하여, 유학생과 청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한다.
이후 6.25 당시 시인 정지용은 의문의 월북을 하게되고, 공권력에 의해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87년 해금될 때가지 근 30여년을 우리에 뇌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곡은 금지곡으로 묶여 노래할 수 없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훗 날에 박화목 시의 망향으로 다시 개사하여 한동안 불리게 되었지만,
무슨 이유가 있어선지 채동선 유족들이 이은상 시인에게 또다시 노랫말을 의뢰하면서
오늘날의 이은상 그리워로 옷을 갈아 입게 되었다.
원래 예술가곡이란 시와 음악의 긴밀한 예술적인 표현에 있다.
시에다 곡을 만들고 또는 곡이 있어 노랫말을 부치는 일련의 과정들이,
대개가 시어에 곡을 붙인 작품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처음의 곡인 정지용 <고향>은 시에 곡을,그 후의<망향>
<그리워>는 본의 아니게 곡에 시어인 노랫말이 만들어진 결과를 낳았다.
어째튼 이 곡에 어느 노랫말을 사용해 불러도 깊은 서정이 넘친다.
그것은 아마도... 모두 서로 예술적인 긴밀함이 배여 있기 때문이리라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운 뒤 1929년에 귀국하였다.
1937년 작곡 발표회를 열고 작곡집을 발간하는 한편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을 위해 활약하였다.
해방 직후, 고려음악회를 조직, 협회장이 되고 이어 문필가 협회장, 예술원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가곡<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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