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2012.05.15 21:32

유봉희 조회 수:513 추천:51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1949~ )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 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 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제4회 목월상 수상작)

Jacques Ibert(이베르) - Escales (Ports of Call;寄港地) - by Munch's conduct
조정권
조정권(1949~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대문로에서 금은방을 하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문재는 양정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나타난다. 1970년에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시인 전봉건이 주재하던 <현대시학>으로 등단한다.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를 나와 김수근이 발행인으로 있던 <공간>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 시절은 당대 예술가들과의 잦은 교류로 그의 예술적 취향이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 신 없는 성당. / 외로움의 성전.”(〈은둔지〉)이라고 믿고, 더 나아가 “시인은 1인 교주이자 / 그 자신이 1인 신도.”(〈은둔지〉)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그는 시라는 종교의 교주이자 단 하나인 신도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과묵 속에 은둔한다. 과묵과 은둔은 시의 배양지이기도 하다. 그는 중세 음악을 즐기고, 단순하고 명징한 시 세계를 추구한다. 그의 시에 두드러지는 여유와 달관은 한때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 철학에 경도한 흔적이다.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떠도는 몸들》 등을 펴냈다. (글. 시인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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