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빌린 말
2008.04.29 12:26
문학 속의 빌린 말(外來語)
소설은 하나의 소재에 대해서 많은 어휘를 동원해서 부풀릴 수 있는 한 크게 부풀려 글을
쓰는 작업이다.
어휘를 많이 동원해야하는 작업인 만큼 종류도 다양하게 나열해야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역사소설과 같은 경우에는 옛날 말에 대한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야겠고 현대소설 같은
경우에는 현대어의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소설에 동원되는 어휘에 있어서 차츰 빌린 말(外來語)이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특히 과거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쓰던 일본식 빌린 말(外來語)나 일본말을 마치 우리말인양
잘못알고 쓰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詩)를 문학의 장미라고 일컫는데 시어(詩語)조차도 우리말을 마다하고 빌린 말(外來語)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젊은 시인(詩人)은 “똥 구루마”라는 시어(詩語)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그 시인(詩人)은 “구루마”라는 말이 일본말인줄 모르고 시어(詩語)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황야”라는 소설에서는 보통명사의 빌린 말(外來語)이 무려 520종류가 동원되었다.
이 소설은 전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동원된 보통명사의 빌린 말(外來語)은 모두 약 3,100회
정도 등장하며 그 중 제일 많이 사용된 낱말이 “그룹”으로서 무려 314회, 그 다음이 “아파
트”로 224회나 사용되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영문 소설을 읽고 있는지 우리 소설을 읽고 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말로 표현을 하더라도 작품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만큼 대단치 않은 빌린 말(外來語)의 어휘를 많이 사용했다는데 대해서 그 작가의 우리말 어휘능력을 짐작케 한다.
이 작가는 우리말 어휘보다는 영어 어휘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말 소설보다는 차라리 영문소설을 쓰는 것이 책도 많이 팔릴 것이고 잘 하면 노벨 문학
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시어(詩語)나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는 대중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시(詩)나 소설에서 빌린 말(外來語)이 많이 사용된 작품들은 우리의 얼이 배인 순수 문학이라 할 수 없다.
한 나라의 순수 문학이란 자기 나라의 언어를 써서 표현하여야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이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문학적 가치가 높게 구성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자기 나랏말이 아닌 빌린 말(外來語) 어휘로 가득 찬 작품은 그 나라의 순수 문학으로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형의 시인(詩人) 한 하운의 “전라도 길(부제: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詩)에서는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じかたび)를 벗으면”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詩)는 시인께서 북한에서 파옥하고 38선을 넘어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도망해왔으나 천
형의 병마로 소록도까지 걸어서 가야하는 고달픔을 읊은 시다.
그 당시에는 광복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일제의 언어인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시
어(詩語)가 대수롭지 않게 보일수도 있겠으나 이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시어(詩語) 한마디가 오늘날에는 이 시(詩)의 문학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詩)의 전편(全篇)에 배어있는 처절함과 사회의 냉대가 잘 표현되어있으나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이 하나의 시어(詩語)로 인해서 널리 세상의 빛을 받지 못하고 묻혀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문학작품에는 어휘 하나가 그 작품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문학 작품에는 빌린 말(外來語)을 쓰지 않으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앞 다
투어 빌린 말(外來語)을 남용한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각성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글 연구회
최 성철
소설은 하나의 소재에 대해서 많은 어휘를 동원해서 부풀릴 수 있는 한 크게 부풀려 글을
쓰는 작업이다.
어휘를 많이 동원해야하는 작업인 만큼 종류도 다양하게 나열해야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역사소설과 같은 경우에는 옛날 말에 대한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야겠고 현대소설 같은
경우에는 현대어의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소설에 동원되는 어휘에 있어서 차츰 빌린 말(外來語)이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특히 과거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쓰던 일본식 빌린 말(外來語)나 일본말을 마치 우리말인양
잘못알고 쓰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詩)를 문학의 장미라고 일컫는데 시어(詩語)조차도 우리말을 마다하고 빌린 말(外來語)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젊은 시인(詩人)은 “똥 구루마”라는 시어(詩語)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그 시인(詩人)은 “구루마”라는 말이 일본말인줄 모르고 시어(詩語)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황야”라는 소설에서는 보통명사의 빌린 말(外來語)이 무려 520종류가 동원되었다.
이 소설은 전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동원된 보통명사의 빌린 말(外來語)은 모두 약 3,100회
정도 등장하며 그 중 제일 많이 사용된 낱말이 “그룹”으로서 무려 314회, 그 다음이 “아파
트”로 224회나 사용되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영문 소설을 읽고 있는지 우리 소설을 읽고 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말로 표현을 하더라도 작품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만큼 대단치 않은 빌린 말(外來語)의 어휘를 많이 사용했다는데 대해서 그 작가의 우리말 어휘능력을 짐작케 한다.
이 작가는 우리말 어휘보다는 영어 어휘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말 소설보다는 차라리 영문소설을 쓰는 것이 책도 많이 팔릴 것이고 잘 하면 노벨 문학
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시어(詩語)나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는 대중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시(詩)나 소설에서 빌린 말(外來語)이 많이 사용된 작품들은 우리의 얼이 배인 순수 문학이라 할 수 없다.
한 나라의 순수 문학이란 자기 나라의 언어를 써서 표현하여야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이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문학적 가치가 높게 구성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자기 나랏말이 아닌 빌린 말(外來語) 어휘로 가득 찬 작품은 그 나라의 순수 문학으로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형의 시인(詩人) 한 하운의 “전라도 길(부제: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詩)에서는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じかたび)를 벗으면”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詩)는 시인께서 북한에서 파옥하고 38선을 넘어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도망해왔으나 천
형의 병마로 소록도까지 걸어서 가야하는 고달픔을 읊은 시다.
그 당시에는 광복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일제의 언어인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시
어(詩語)가 대수롭지 않게 보일수도 있겠으나 이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시어(詩語) 한마디가 오늘날에는 이 시(詩)의 문학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詩)의 전편(全篇)에 배어있는 처절함과 사회의 냉대가 잘 표현되어있으나 “지까다비(じかたび)”라는 이 하나의 시어(詩語)로 인해서 널리 세상의 빛을 받지 못하고 묻혀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문학작품에는 어휘 하나가 그 작품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문학 작품에는 빌린 말(外來語)을 쓰지 않으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앞 다
투어 빌린 말(外來語)을 남용한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각성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글 연구회
최 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