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거

2011.12.01 23:09

이주희 조회 수:1220 추천:189

동거 / 이주희
여보시게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돌이켜보니 입맞춤을 허락한 것이 화근이었네 호두껍데기처럼 단단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잘근 깨물고 나서부터 우리의 기묘한 동거는 시작되었지 희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아주 싫어한 반면 죽음의 골짜기처럼 음침한 곳을 너무나 좋아했어 그가 즐기는 것이란 육체를 탐하는 것으로 시도 때도 없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욕실이건 주방에서건 스멀거리며 몸을 더듬는 것이 주된 일이야 급기야는 기둥서방이라도 되려고 작정을 했는지 식솔들을 잔뜩 데려와선 합심해서 내 한쪽 다리와 어깨를 야금야금 뜯어 먹었어 오늘은 옆구리를 갉아 먹히는 중이야 어느새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진 뼈마디 속으로 송곳을 들고 들어온 찬바람이 떠밀려가는 세월을 깊게도 옹이 박고 있어 내가 없어진다- 내가 없어지고 있다아- 도리질 치며 소리쳤지만 밖으로 열리지 않는 창틀은 삐꺽거리며 떠나버린 사람들을 기다렸고 비어 있는 창자엔 뜯어 먹힌 만큼의 모래들이 쌓여갔어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아프고 추워 웃음소리가 들려왔어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인 깨끔 발 잘 뛰는 아이의 목소리지 누르면 움츠러드는 스펀지처럼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내 팔목을 무심코 잡던 아이 손에 살점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갔어 아이 아버지가 다가와 내 몸을 찬찬히 살펴볼 때는 어찌할까싶어 전율이 다 일어났지 며칠 후 어떤 이가 와서 마치 관속에 들어가는 예행연습을 하듯 내 입과 땀샘 그리고 항문까지 꼭꼭 틀어막고 커다란 천으로 온몸을 칭칭 휘감더니 마취를 시켜버렸다네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의식 안으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어 뭐라 했는지 아나 Termites 퇴치하고 나면 기둥뿌리 하나는 잘라내고 Redwood로 깁스를 해줘야지 하더구먼. -소리비에서-
*Termite (터마이트) 흰개미라고도 함. 사회생활을 하며 셀룰로오스를 먹고 사는 흰개미목(─目 Isoptera) 곤충. *Redwood (레드우드) 학명 (Sequoia) 삼나무 곤충, 곰팡이, 불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며 붉은빛이 도는 갈색으로 목재용으로 많이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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