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낱알 하나

2012.10.18 14:21

이주희 조회 수:1197 추천:148


낱알 하나 / 이주희


    토막 난 철사들이 개미떼처럼 기어 나온다

    지금 내 시야를 후벼 파고 있는 저것들은

    인공위성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가나다라 철자

    한때는 손가락 끝에 힘을 모아 미래를 써 내리고

    나직나직 붓끝으로 속삭였던 봄날의 편지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섰던 언 발처럼

    온 종일 자판을 두드리고 두드려도

    가슴 열리지 않는 오후의 하늘은 왜 이리도 맑아

    속 쓰리도록 울다간 매미는 여물지 못한 낟알 하나

    허수아비에게 남겨준 채 마른 검불이 되었다

    햇살 한줌이 벌새와 같이 뒤란으로 찾아와

    짙은 키스로 과일의 향을 빨고 핥는 가을 문턱

    설익은 거듭 그리 굼뜨게만 있으려나

    모니터 속으로 구급차가 달려가고 있다.


    -(소리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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