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2010.04.21 11:32

이주희 조회 수:2344 추천:292

칼 / 이주희
**칼은 섬뜩하게 사고를 내기도 하지만 생활하는 데 매우 필요한 도구이다. 어느 집을 막론하고 서너 개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것이며 어떤 제품을 쓸 것인가는 주로 주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여성들이 선택하게 된다.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변변치 않아 여기저기 알아보니 한국주부들 대부분이 독일의 OO사 것을 선호했다. 대장장이 마을에서 시작된 이 제품은 270여 년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오늘날에는 세라믹과 레이저 검까지 생산한다고 한다. 또한, 세계 100대 명품 반열에도 들어 있다. 스테인리스(Stainless) 칼은 날도 잘 서며 습한 환경에서도 녹이 잘 슬지 않는 장점이 있어 오래 쓸 수가 있다. 현지에서 내놓는 쌍둥이마크는 값이 꽤 비싸지만, 타국에 주문하여 만든다는 외동이 마크는 값이 조금 싸다. 큰맘 먹고 사는 것이라 생각 같아선 쌍둥이들만 데려오고 싶었지만, 외동 이도 함께 데려와 살펴보니 주방의 예술이라는 소리에 걸맞게 칼자루, 칼 목, 칼날의 접합 이음새가 섬세히 다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내무사열 하듯 칼집에 세워두니 마치 일곱의 주방보조원을 둔 것처럼 든든했다. 식칼은 길이가 20cm 정도이며 날이 넓다. 김치를 썰거나 고기와 생선을 자르는 데 사용한다. 자주 쓰는 것이어서 오른쪽 위에 꽂았다. 그 아래 있는 것은 치즈 칼이다. 칼 머리가 넓고 아랫부분이 둥글며 날에 구멍이 나 있어 잘라낸 치즈가 잘 달라붙지 않는다. 예쁜 모양으로 잘라낼 수 있다지만 지금껏 멋스럽게 썰어보지는 못했다. 다음번에 있는 것은 8cm 정도의 과도로, 주로 과일이나 채소를 다듬을 때 사용한다. 시금치를 다듬고 나서 밑에 펼쳐놨던 신문지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나간 것을 밑바닥까지 뒤져 찾아낸 것이다. 좌측 맨 아래 네 번째 것은 회칼이다. 각종 음식재료를 얇게 저미기 좋게끔 얄따랗고 날래게 생겼다. 끝 날이 쪽 빠른 것이 어째 음산하게까지 보이는 것은, 조폭들이 지역다툼 할 때 이런 것을 들고 휘둘렀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위 포크처럼 생긴 것은 찜닭 같은 뜨거운 것을 꿰어 끄집어내는 것이고, 가위 위에 지휘봉처럼 생긴 것은 칼갈이다. 무뎌진 칼날을 봉에 대고 문대주면 절삭력이 되살아난다. 이게 없었을 때는 숫돌 대신 항아리 뚜껑이나 은박지를 뭉쳐 그곳에 날을 갈아 쓰곤 했다. 같은 칼이라도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면 문명의 고마움을 느끼지만,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되니 두렵기도 하다. 그 날카로움으로 인해 칼이 속담에 들어가면 부드러움이나 여유로움보다는 강압적이고 사뭇 교훈적이다. 우리는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출퇴근 시간을 꼭 지키는 사람을 가리켜 칼이라 한다. 작은 일에 지나친 대책을 세울 때는 ‘모기 보고 칼 뺀다.’ 하고, 내외간이 싸우면 ‘칼로 물 베기’라 하며, 친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해할 생각을 품고 있음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한다. 칼, 칼, 하다 보니 Karl Marks란 이름이 떠오른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그는 ‘상업자본이 절대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면 곳곳에서 약탈을 위한 조직이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짐승이야 오로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세우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일까? 믿음과 신의를 무 자르듯 잘라내기도 하고, 칼날 잡은 놈이 칼자루 잡은 놈한테 당하고, 칼 든 놈이 칼로 망하니 이를 갈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2m에 달하는 장검을 뽑아들었던 이순신 장군의 칼은 얼마나 눈부시며 찬란하던가? 사랑을 지키고자 여인들이 꺼내 들었던 은장도는 얼마나 애절하고 아름답던가?! 싱크대 서랍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칼들이 몇 개 더 들어 있다. 파를 채 써는 채칼과 날이 물결모양으로 처리된 빵 칼, 채소 껍질을 벗기는 구멍 칼, 여러 가지 기능을 몸통에 움츠려 넣은 주머니칼 등등이다. 부엌칼을 잘 다루는 이가 만든 음식은 맛도 있고 보기에도 좋다. 여성들이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일류요리사 자리는 남성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어린 시절 동네골목에서 나무칼을 손에 쥐고 '나를 따르라!' 외치며 일찌감치 칼 쓰는 법을 배워둬서일까? 갑자기 할머니의 손맛이 담겨 있던 칼국수가 먹고 싶어진다. 주방으로 나가 제일 먼저 멸치로 육수를 내자. 그런 다음 밀가루반죽을 해서 밀대로 밀어 말아 칼로 썰어 분가루를 살살 발라줘야지. 감자는 깎아서 끓는 육수에 집어넣고, 계란 고명도 얹기 좋게 만들고, 구운 김도 찾아놓고. 호박은 채 썰어 소금에 살짝 절였다 볶아놔야지. 김치도 꺼내 삼등분해 썰어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으려면 서둘러야겠다. 손가락 베지 말고 조심조심하면서. (미주문학. 2011. 수필동인.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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