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周時經) 스승과 그 제자들.
2008.11.09 11:26
주시경(周時經) 스승과 그 제자들.
주시경(周時經) 스승님은 자신의 연구에서, 글자를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굴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나누었으며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漢字)대신 국문(國文=한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분으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인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이윤재, 이병기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한글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람들은 “한글은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거역(拒逆)했다는 말이다.
세계 모든 글자가 그렇듯 일본 글자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형태주의(形態主義)인 표의적기사법(表意的記寫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뜻을 적는 글자가 아니라 소리를 적는 글자이다.
그들은 자신들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소리를 적는 한글[기음문자(記音文字)]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키면서 자신들의 영달(榮達)을 위해서 친일분자(親日分子)로 변신(變身)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참여정부시절 문화체육부장관이 “자장면”은 표기에 대한 측면이고, “짜장면”은 발음에 대한 측면이라는 엉터리 논리로 답변을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들을 가리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 국채(國債)보다 일본 국채(國債)를 많이 사재기하는 유 장관다운 답변이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우리말과 글을 지킨 것은 그들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이다.
일본은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1912년에 이미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을 만들었고, 1921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를 만들었으며, 또다시 1928년에 시작하여 1930년에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실상 이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은 표음적기사법(表音的記寫法) 지지파(支持派) 때문에 완벽한 형태주의를 채택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이 조선 총독부에서 발표되고 시행에 들어가자 이 철자법(綴字法)을 제정할 때 참여했던 최현배,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등은 불만을 품고 조선어학회로 무대를 옮겨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바탕으로 자기네들이 주창해온 형태주의 표기법을 더욱 보완한 소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스승을 매도하고 친일했던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도 그들을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승을 욕보이고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일본 앞잡이로 일했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한다면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지고 순사하신 분들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일제 때 학교에서 조선어과가 없어진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민족말살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감행하면서부터이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은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하였던 것이므로 적어도 1936년까지는 우리말과 글이 사용되었고 일본이 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욕보인 죄인들, 그것도 모자라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대접해 주는 이 나라 백성들이 어리석고 불쌍하기만 하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독부에서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친일분자로 보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한글 연구회
최 성철
주시경(周時經) 스승님은 자신의 연구에서, 글자를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굴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나누었으며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漢字)대신 국문(國文=한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분으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인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이윤재, 이병기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한글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람들은 “한글은 소리를 적는 글자[기음문자(記音文字)]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거역(拒逆)했다는 말이다.
세계 모든 글자가 그렇듯 일본 글자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형태주의(形態主義)인 표의적기사법(表意的記寫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뜻을 적는 글자가 아니라 소리를 적는 글자이다.
그들은 자신들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소리를 적는 한글[기음문자(記音文字)]을 뜻을 적는 글자[기사문자(記事文字)]로 둔갑시키면서 자신들의 영달(榮達)을 위해서 친일분자(親日分子)로 변신(變身)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참여정부시절 문화체육부장관이 “자장면”은 표기에 대한 측면이고, “짜장면”은 발음에 대한 측면이라는 엉터리 논리로 답변을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들을 가리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 국채(國債)보다 일본 국채(國債)를 많이 사재기하는 유 장관다운 답변이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우리말과 글을 지킨 것은 그들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이다.
일본은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1912년에 이미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을 만들었고, 1921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를 만들었으며, 또다시 1928년에 시작하여 1930년에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실상 이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은 표음적기사법(表音的記寫法) 지지파(支持派) 때문에 완벽한 형태주의를 채택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새 철자법인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이 조선 총독부에서 발표되고 시행에 들어가자 이 철자법(綴字法)을 제정할 때 참여했던 최현배,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정 열모 등은 불만을 품고 조선어학회로 무대를 옮겨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바탕으로 자기네들이 주창해온 형태주의 표기법을 더욱 보완한 소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니 그들이 스승을 매도하고 친일했던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도 그들을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신 조선어학회의 선각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승을 욕보이고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일본 앞잡이로 일했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한다면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지고 순사하신 분들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일제 때 학교에서 조선어과가 없어진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민족말살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감행하면서부터이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은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하였던 것이므로 적어도 1936년까지는 우리말과 글이 사용되었고 일본이 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스승의 뜻에 거역하고 욕보인 죄인들, 그것도 모자라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을 선각자라고 대접해 주는 이 나라 백성들이 어리석고 불쌍하기만 하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독부에서 ‘언문 철자법(諺文 綴字法)’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친일분자로 보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한글 연구회
최 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