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형효순
2009.04.11 10:19
세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전주에 가려고 직행버스 차표를 샀다. 표를 받는 운전기사가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자리에 앉아서 한참 생각하다가 맨 앞에 붙어있는 기사증을 보았다. 그랬다. 그 낯익은 얼굴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는 근무 중이었고 나는 승객인지라 몇 마디 안부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출발 전 그가 내 손에 버스표를 물려왔다면서 6,000원을 쥐어주고 기사자리로 돌아갔다. 나에게 쥐어준 6,000원의 의미, 그것은 초등학교 때의 순수한 소년의 마음이었다. 그의 흰머리 섞인 뒷모습이 따뜻하기도 하고 왜 그런지 서글프기도 했다.
6․25 동란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생활이 모두 고만고만했었다. 운동화나 교복을 차려 입을 수 있는 아이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왓바리(일본표기)라는 교복 검사를 날마다 했지만 그것조차 못 입는 아이가 많았다. 학교 건물도 없었다. 분교로 갈라진 학교에 입학한 우리들은 느티나무에 칠판을 매달아 놓고 공부를 하다가 비가 오면 동네 사랑방으로 피신하곤 했었다. 가교사가 지어진 건물에서 한 의자에 열 명씩 앉을 수 있는 긴 책상과 걸상에 앉아 제비들처럼 선생님을 처다 보면서 글을 읽었었다.
콘크리트 교실이 지어질 무렵은 4학년 때였다. 우리는 하루에 한 시간씩 단가를 들고 5학년 때까지 학교건물 뒤의 흙을 파냈다. 6학년은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 일을 시키면 안 되고 저학년은 어려서 일을 못하니 우리들만 일을 한 셈이었다. 책보는 돌을 주워 오느라고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니 나는 일복을 타고난 팔자임에 틀림없었다. 평생 눈 속에서 파란 초목을 일궈내야 하는 사주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새 교실에서 공부하던 즐거움은 셋방에 살다가 자기 집을 가지는 그런 기쁨 같은 것이었다. 하나뿐인 풍금 때문에 음악시간이 겹쳐지지 않게 시간표를 짜느라 애를 먹었던 선생님들, 한 분뿐인 음악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날에는 손 지휘봉 하나로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었다. 어떤 반 교실바닥이 더 윤이 나는지 내기를 하면서 내 집처럼 열심히 교실바닥과 복도를 닦던 아이들이었다.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알면서 가난 속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하나뿐인 연필을 잃어버리고 쓰기를 못하던 옆 짝꿍, 물감이 없어서 미술시간에 색칠을 못하고 상급반인 오빠교실로 달려가던 나, 도시락이 없어서 점심을 못 먹던 윤이, 깡보리밥에 고추장 하나 달랑 싸오던 경칠이, 우산이 없어서 토란잎을 쓰고 빗속을 달리던 칠구, 결석하기 싫어서 동생을 데리고 학교까지 다녀야 했던 화순이, 월사금이 없어서 자주 교실 뒤에 손들고 서있던 종만이, 공부보다는 부모님들 일터로 먼저 달려가야 했던 우리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날마다 외우라고 다그쳤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 졸업식에 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울던 우리였는데 공부가 지긋지긋하다면서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교복을 찢는 지금의 아이들이 그 때 우리들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졸업식 날, 우리는 1963년 3월 3회 졸업생이고 우리나라사람들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니 너희들도 틀림없이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알맞은 일꾼이 될 것으로 믿는다던 교장선생님 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힘까지 빌려서 지은 모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폐교가 되어 쓸쓸하고 적막하다.
당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체벌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부모들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 체벌이 사회문제가 되고, 학생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며, 부모와 선생님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선생님도 지식을 전달하는 직업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경제권은 이미 세계 10위권에 올라섰고, 물질만능시대의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한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인적자원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지식인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는데 찬성한다. 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보다는 학부모와 선생님,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사회 곳곳에서 적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할 즈음에 동창회를 가졌었다. 특별하게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던 문구대로 이 나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의무를 띠고 태어난 값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다만 가난이 싫다는 이유로 부지런히 고향을 등진 대가로 희망과 꿈을 키우던 모교가 폐교로 변하게 일조한 것을 빼면 우리는 이 나라가 성장하는 밑거름으로 땀을 흘리면서 희생적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데 어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저 친구도 몇 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다고 들었었다. 자랄 때 어머니 사랑도 충분하게 받지 못했는데 왜 하필 아내까지 일찍 갔을까.
버스는 산과 들, 마을을 지나 개나리꽃 참꽃을 뒤로 하며 달리고 있다. 우리 인생도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흰머리는 나이 들면 생기는 것이 당연하건만 오늘따라 운전을 하는 그 친구 뒷모습에 눈길이 닿으니 서글프다.
까까머리 6년이라는 세월은 긴 세월일까 짧은 세월일까. 시청 앞에서 내리면서 잠깐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 통통하고 귀엽던 어린소년이 잠시 어려 있었다. 버스가 떠나자 내 곁에서 머물던 개구쟁이 코흘리개 친구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사라져갔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전주에 가려고 직행버스 차표를 샀다. 표를 받는 운전기사가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자리에 앉아서 한참 생각하다가 맨 앞에 붙어있는 기사증을 보았다. 그랬다. 그 낯익은 얼굴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는 근무 중이었고 나는 승객인지라 몇 마디 안부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출발 전 그가 내 손에 버스표를 물려왔다면서 6,000원을 쥐어주고 기사자리로 돌아갔다. 나에게 쥐어준 6,000원의 의미, 그것은 초등학교 때의 순수한 소년의 마음이었다. 그의 흰머리 섞인 뒷모습이 따뜻하기도 하고 왜 그런지 서글프기도 했다.
6․25 동란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생활이 모두 고만고만했었다. 운동화나 교복을 차려 입을 수 있는 아이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왓바리(일본표기)라는 교복 검사를 날마다 했지만 그것조차 못 입는 아이가 많았다. 학교 건물도 없었다. 분교로 갈라진 학교에 입학한 우리들은 느티나무에 칠판을 매달아 놓고 공부를 하다가 비가 오면 동네 사랑방으로 피신하곤 했었다. 가교사가 지어진 건물에서 한 의자에 열 명씩 앉을 수 있는 긴 책상과 걸상에 앉아 제비들처럼 선생님을 처다 보면서 글을 읽었었다.
콘크리트 교실이 지어질 무렵은 4학년 때였다. 우리는 하루에 한 시간씩 단가를 들고 5학년 때까지 학교건물 뒤의 흙을 파냈다. 6학년은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 일을 시키면 안 되고 저학년은 어려서 일을 못하니 우리들만 일을 한 셈이었다. 책보는 돌을 주워 오느라고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니 나는 일복을 타고난 팔자임에 틀림없었다. 평생 눈 속에서 파란 초목을 일궈내야 하는 사주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새 교실에서 공부하던 즐거움은 셋방에 살다가 자기 집을 가지는 그런 기쁨 같은 것이었다. 하나뿐인 풍금 때문에 음악시간이 겹쳐지지 않게 시간표를 짜느라 애를 먹었던 선생님들, 한 분뿐인 음악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날에는 손 지휘봉 하나로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었다. 어떤 반 교실바닥이 더 윤이 나는지 내기를 하면서 내 집처럼 열심히 교실바닥과 복도를 닦던 아이들이었다.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알면서 가난 속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하나뿐인 연필을 잃어버리고 쓰기를 못하던 옆 짝꿍, 물감이 없어서 미술시간에 색칠을 못하고 상급반인 오빠교실로 달려가던 나, 도시락이 없어서 점심을 못 먹던 윤이, 깡보리밥에 고추장 하나 달랑 싸오던 경칠이, 우산이 없어서 토란잎을 쓰고 빗속을 달리던 칠구, 결석하기 싫어서 동생을 데리고 학교까지 다녀야 했던 화순이, 월사금이 없어서 자주 교실 뒤에 손들고 서있던 종만이, 공부보다는 부모님들 일터로 먼저 달려가야 했던 우리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날마다 외우라고 다그쳤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 졸업식에 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울던 우리였는데 공부가 지긋지긋하다면서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교복을 찢는 지금의 아이들이 그 때 우리들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졸업식 날, 우리는 1963년 3월 3회 졸업생이고 우리나라사람들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니 너희들도 틀림없이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알맞은 일꾼이 될 것으로 믿는다던 교장선생님 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힘까지 빌려서 지은 모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폐교가 되어 쓸쓸하고 적막하다.
당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체벌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부모들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 체벌이 사회문제가 되고, 학생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며, 부모와 선생님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선생님도 지식을 전달하는 직업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경제권은 이미 세계 10위권에 올라섰고, 물질만능시대의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한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인적자원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지식인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는데 찬성한다. 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보다는 학부모와 선생님,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사회 곳곳에서 적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할 즈음에 동창회를 가졌었다. 특별하게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던 문구대로 이 나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의무를 띠고 태어난 값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다만 가난이 싫다는 이유로 부지런히 고향을 등진 대가로 희망과 꿈을 키우던 모교가 폐교로 변하게 일조한 것을 빼면 우리는 이 나라가 성장하는 밑거름으로 땀을 흘리면서 희생적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데 어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저 친구도 몇 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다고 들었었다. 자랄 때 어머니 사랑도 충분하게 받지 못했는데 왜 하필 아내까지 일찍 갔을까.
버스는 산과 들, 마을을 지나 개나리꽃 참꽃을 뒤로 하며 달리고 있다. 우리 인생도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흰머리는 나이 들면 생기는 것이 당연하건만 오늘따라 운전을 하는 그 친구 뒷모습에 눈길이 닿으니 서글프다.
까까머리 6년이라는 세월은 긴 세월일까 짧은 세월일까. 시청 앞에서 내리면서 잠깐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 통통하고 귀엽던 어린소년이 잠시 어려 있었다. 버스가 떠나자 내 곁에서 머물던 개구쟁이 코흘리개 친구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