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부부가 사는 이야기/정원정
2009.06.14 05:07
요산부부가 살아가는 이야기
정 원 정
“새 소리 흉내쟁이 요산아저씨”란 동화책이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과 산 이름은 실제와 다르지만 이야기 줄거리는 실화이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읽어볼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인공인 K화백부부가 산언덕의 외딴 집에서 사는 모습을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조금도 보태거나 꾸밈없이 그대로 전해주는 이야기다. 오밀조밀한 재미와 오묘한 이야기 속에는 인생살이에서 인과(因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 사람이 어디까지 인간적이어야 하는 가도 보여주고 있다.
K화백의 부인과 나는 오랜 지기이다. 내가 30대 후반 무렵 지방의 한 대도시에서 그와 이웃하며 살았었다. 그때 그녀는 생기발랄한 20대였다. <앤>을 일곱 번씩이나 읽을 만큼 독서열이 높았던 그녀는 곧잘 인생의 철학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내 옅은 지식으로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때 <사상계>(思想界)를 정기 구독하는 내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가 얽혀서 서로 가까워졌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오고가는 사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 속에 주고받은 편지로도 이어졌다. 지금 두어 장이 남아 있는 편지를 읽어보면 인생문제를 꽤 심각하게 서로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는 별난 데가 있었다. 그때 처녀인 그녀는 남자 고무신에 몸뻬를 입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그러한 품새로 몇몇 명사들과 교류를 갖는 모양이 당당하고 멋있어 보일 때도 있었다. 솔직담백하고 사리를 일찍 지각한 그녀가 어느 날 배우자로 선택한 분이 K화백이다. 그분은 외진 산언덕에 아담한 남향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하며 수행자처럼 사는 동양화가였다. 그 유명한 동양화가 허백련 화백의 수제자로 맥을 이어오던 시절, 총각처녀가 만난 것이다.
몇 해 전 위 동화 속 이야기를 그 부인으로부터 대충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이청준 소설가가 동화책으로 묶어냈다는 이야기도 듣고 흘려버렸었다. 그러다가 이번 추석에 나는 큰아들 집에 머무르면서 K화백이 동물과 소통한 이야기를 들은 대로 꺼냈더니 듣고 있던 며느리가 “그 책 우리 집에 있어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읽어보게 되었다. 96쪽밖에 되지 않는 엷은 책이었다. 건성으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찬찬히 읽어 보았다.
책 내용을 보면 산에서 K화백은 강아지, 닭 말고도 뱀, 청설모, 들 고양이, 다람쥐, 까치, 참새, 굴뚝새, 후꿍새, 소쩍새들의 소리를 흉내 내어 이들과 서로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사람의 말로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들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보호해 주며 보살피기도 한다. 여름이면 뱀이 마루 밑까지 와 있어도 해치지 않고 말로 “너의 생김새를 사람들이 싫어하니 어서 숲으로 들어가라.”하고 얼러서 쫓아 보내기도 한다.
어느 날 실수로 뱀 한 마리를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산에 잘 묻어 주었다. 그 일은 잊어버린 채 그날 오후 방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꼭 누가 밖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살펴보니 투명 비닐로 가린 뒷벽 창문에 긴 뱀이 달라붙어 고개를 까닥이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대뜸 이 녀석이 아침에 자신이 실수로 죽인 녀석과 내외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화책에는 생략되었지만 뱀은 발정기인지 배 밑이 헐은 듯 불그스름히 상처가 나 있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를 동화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 그래. 네가 아침녘에 죽은 놈과 내외간이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네가 가엾은 짝을 대신해 내 잘못을 물으려 왔느냐. 하지만 그만한 생각과 마음을 지녔으면 너도 아마 알겠지만, 내가 어찌 네 짝을 일부러 그랬겠느냐. 어쨌든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 이젠 이쯤해서 나를 용서하고 물러가거라.” 하지만 녀석은 꼼짝도 않고 비닐에 눌러 붙은 채 방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K화백은 등에서 식은 땀까지 솟았다고 한다. K화백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빌었다. 그리고 뱀과 맹세까지 하며 사람의 말로 한참을 빌고 눈을 떠보니 어디론가 뱀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후에 K화백은 뱀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것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미물과도 사람을 대하듯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산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인에게 K화백은 겪은 일을 말하면서 “뱀이 저희들끼리 말은 하지 못하지만, 녀석도 결국은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겠지.” 했다. 부인의 짓궂은 대답이 걸작이다. “뱀들이라고 왜 자기들끼리 말이 없겠어요? 가늘고 검은 혀로 날름거리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지금보다 뱀들과 더 잘 통하려면 당신은 이제부터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말도 새로 배워야 할 거예요.”
또 한 가지,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두 부부가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 한 등산객이 물을 마시려고 빈집에 들어가려 했다. 산에서는 빈집이라도 흔히 들어가서 물을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강아지 똘똘이가 어찌나 으르렁대며 위협을 하던지 물을 못 마신 적이 있었다. 두어 차례 그런 일을 겪은 등산객은 K화백을 만나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K화백은 그 등산객에게 미안한 나머지 똘똘이에게 야단을 치며, “어서 집을 나가! 다신 들어올 생각 마!” 하고 그 등산객이 보는 앞에서 문밖으로 내쫓았다. 평소에도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똘똘이였다. 밤이 되어도 똘똘이는 돌아올 줄 몰랐다. 그 사이 눈이 땅 위에 소복이 쌓였다. 그 이튿날도 소리소리 불러 찾아도 끝내 못 찾았다. 집 근방을 다 뒤져 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며칠 뒤 눈이 녹은 집 앞 담장 밑에서 똘똘이는 죽은 채 발견되었다. 주인이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외에 들 고양이가 추운 겨울에 새끼를 낳은 걸 보고 조심스럽게 따뜻한 먹이를 주며 “야옹, 야옹”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며 산후조리를 시킨 이야기가 따뜻한 감동을 자아낸다.
나는 이 동화책을 덮으며, 참으로 함부로 살았다는 자괴감이 밀려 왔다. 나를 해치는 곤충은 여지없이 죽인 일이 떠올랐다. 동물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내게는 선성(善性)이 희박하구나 싶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선한 심성을 챙길 수 있으며 자연 속에서 동물과 곤충도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주소 : 서울시 강북구 삼각산동 에스케이북한산시티 아파트 107동 601호
이메일 : ssjwj@naver.com
이름 : 정원정
전화번호 : 02-982-2935
경력 : 1929년 전북 고창 출생,
2008년 <대한문학> 수필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전북문인협회 회원.
정 원 정
“새 소리 흉내쟁이 요산아저씨”란 동화책이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과 산 이름은 실제와 다르지만 이야기 줄거리는 실화이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읽어볼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인공인 K화백부부가 산언덕의 외딴 집에서 사는 모습을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조금도 보태거나 꾸밈없이 그대로 전해주는 이야기다. 오밀조밀한 재미와 오묘한 이야기 속에는 인생살이에서 인과(因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 사람이 어디까지 인간적이어야 하는 가도 보여주고 있다.
K화백의 부인과 나는 오랜 지기이다. 내가 30대 후반 무렵 지방의 한 대도시에서 그와 이웃하며 살았었다. 그때 그녀는 생기발랄한 20대였다. <앤>을 일곱 번씩이나 읽을 만큼 독서열이 높았던 그녀는 곧잘 인생의 철학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내 옅은 지식으로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때 <사상계>(思想界)를 정기 구독하는 내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가 얽혀서 서로 가까워졌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오고가는 사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 속에 주고받은 편지로도 이어졌다. 지금 두어 장이 남아 있는 편지를 읽어보면 인생문제를 꽤 심각하게 서로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는 별난 데가 있었다. 그때 처녀인 그녀는 남자 고무신에 몸뻬를 입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그러한 품새로 몇몇 명사들과 교류를 갖는 모양이 당당하고 멋있어 보일 때도 있었다. 솔직담백하고 사리를 일찍 지각한 그녀가 어느 날 배우자로 선택한 분이 K화백이다. 그분은 외진 산언덕에 아담한 남향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하며 수행자처럼 사는 동양화가였다. 그 유명한 동양화가 허백련 화백의 수제자로 맥을 이어오던 시절, 총각처녀가 만난 것이다.
몇 해 전 위 동화 속 이야기를 그 부인으로부터 대충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이청준 소설가가 동화책으로 묶어냈다는 이야기도 듣고 흘려버렸었다. 그러다가 이번 추석에 나는 큰아들 집에 머무르면서 K화백이 동물과 소통한 이야기를 들은 대로 꺼냈더니 듣고 있던 며느리가 “그 책 우리 집에 있어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읽어보게 되었다. 96쪽밖에 되지 않는 엷은 책이었다. 건성으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찬찬히 읽어 보았다.
책 내용을 보면 산에서 K화백은 강아지, 닭 말고도 뱀, 청설모, 들 고양이, 다람쥐, 까치, 참새, 굴뚝새, 후꿍새, 소쩍새들의 소리를 흉내 내어 이들과 서로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사람의 말로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들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보호해 주며 보살피기도 한다. 여름이면 뱀이 마루 밑까지 와 있어도 해치지 않고 말로 “너의 생김새를 사람들이 싫어하니 어서 숲으로 들어가라.”하고 얼러서 쫓아 보내기도 한다.
어느 날 실수로 뱀 한 마리를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산에 잘 묻어 주었다. 그 일은 잊어버린 채 그날 오후 방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꼭 누가 밖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살펴보니 투명 비닐로 가린 뒷벽 창문에 긴 뱀이 달라붙어 고개를 까닥이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대뜸 이 녀석이 아침에 자신이 실수로 죽인 녀석과 내외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화책에는 생략되었지만 뱀은 발정기인지 배 밑이 헐은 듯 불그스름히 상처가 나 있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를 동화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 그래. 네가 아침녘에 죽은 놈과 내외간이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네가 가엾은 짝을 대신해 내 잘못을 물으려 왔느냐. 하지만 그만한 생각과 마음을 지녔으면 너도 아마 알겠지만, 내가 어찌 네 짝을 일부러 그랬겠느냐. 어쨌든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 이젠 이쯤해서 나를 용서하고 물러가거라.” 하지만 녀석은 꼼짝도 않고 비닐에 눌러 붙은 채 방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K화백은 등에서 식은 땀까지 솟았다고 한다. K화백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빌었다. 그리고 뱀과 맹세까지 하며 사람의 말로 한참을 빌고 눈을 떠보니 어디론가 뱀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후에 K화백은 뱀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것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미물과도 사람을 대하듯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산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인에게 K화백은 겪은 일을 말하면서 “뱀이 저희들끼리 말은 하지 못하지만, 녀석도 결국은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겠지.” 했다. 부인의 짓궂은 대답이 걸작이다. “뱀들이라고 왜 자기들끼리 말이 없겠어요? 가늘고 검은 혀로 날름거리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지금보다 뱀들과 더 잘 통하려면 당신은 이제부터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말도 새로 배워야 할 거예요.”
또 한 가지,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두 부부가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 한 등산객이 물을 마시려고 빈집에 들어가려 했다. 산에서는 빈집이라도 흔히 들어가서 물을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강아지 똘똘이가 어찌나 으르렁대며 위협을 하던지 물을 못 마신 적이 있었다. 두어 차례 그런 일을 겪은 등산객은 K화백을 만나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K화백은 그 등산객에게 미안한 나머지 똘똘이에게 야단을 치며, “어서 집을 나가! 다신 들어올 생각 마!” 하고 그 등산객이 보는 앞에서 문밖으로 내쫓았다. 평소에도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똘똘이였다. 밤이 되어도 똘똘이는 돌아올 줄 몰랐다. 그 사이 눈이 땅 위에 소복이 쌓였다. 그 이튿날도 소리소리 불러 찾아도 끝내 못 찾았다. 집 근방을 다 뒤져 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며칠 뒤 눈이 녹은 집 앞 담장 밑에서 똘똘이는 죽은 채 발견되었다. 주인이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외에 들 고양이가 추운 겨울에 새끼를 낳은 걸 보고 조심스럽게 따뜻한 먹이를 주며 “야옹, 야옹”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며 산후조리를 시킨 이야기가 따뜻한 감동을 자아낸다.
나는 이 동화책을 덮으며, 참으로 함부로 살았다는 자괴감이 밀려 왔다. 나를 해치는 곤충은 여지없이 죽인 일이 떠올랐다. 동물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내게는 선성(善性)이 희박하구나 싶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선한 심성을 챙길 수 있으며 자연 속에서 동물과 곤충도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주소 : 서울시 강북구 삼각산동 에스케이북한산시티 아파트 107동 601호
이메일 : ssjwj@naver.com
이름 : 정원정
전화번호 : 02-982-2935
경력 : 1929년 전북 고창 출생,
2008년 <대한문학> 수필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전북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