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김대중/이수홍
2009.08.28 07:00
아, 김대중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수홍
김대중(金大中)! 이름 참 좋다. 나는 작명가도 아니요 이름풀이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부르기 좋고 쓰기 좋으니 얼마나 좋은가. 인물 좋고 이름이 좋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가 보다.
8월 18일 오후, 건지산 체련공원 축구장 옆 벤치에서 자주 만나는 노신사로부터 그분의 서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육체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라 연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소식은 충격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 그로 인해서 돌아가셨다. 금년은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돌아가시는 운세의 해란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다음날 건지산에 오를 때 앞에 가는 젊은 여자 세 사람의 대화내용이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마다 그게 화제요, 각종 매스컴마다 온통 그 뉴스로 돼를 하고 있다. 한반도가 펄펄 끓는 듯하다. 오늘이 처서인데도 날씨가 따갑고 화끈거리는 것이 그 영향인 듯싶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시작하여 하도 유명한 말과 어록이 많아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나 해야겠다.
1971년도 내가 무주경찰서 수사과장으로 근무할 때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김대중이 김영삼을 물리치고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대결했다. 그때는 공공연히 공무원더러 집권여당의 선거운동을 하라고 했었다. 경찰서 과장들도 각 면을 담당하여 운동하라고 했다. 아직 민주화가 되지 않은 때라 공무원의 선거운동은 잘 먹혀들었다. 생각하면 공무원의 선거운동은 선량한 국민에 대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개표결과 표가 적게 나오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까봐 찍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반 조장행정기관은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협박이고, 경찰은 불법행위를 했을 때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라고나 할까.
각 시군을 담당하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감시하고 있어 일과시간에도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담당 면에 나가 이장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원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동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권이 바뀔 테니 너무 적극적으로 운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은 약국을 운영하는 申모와 신문사 지국장 朴씨 그리고 李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야당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사과장은 야당들과 친한 사람이라고 찍혀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판에 남원 동서의 전화는 나를 웃게 하였다. 이럴 때 웃음을 회소(詼笑)(실없이 웃는 웃음)라고 한다던가.
그때 서울 사는 형님은 전라도 사람이라 그러기도 했지만 김대중을 무척 좋아했다. 정치, 경제, 사회라고 하지 않은가, 정치가 민생의 근본이라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연설에 반해서 맹신자가 되어버렸다. 수원에서 유세가 있다면 그곳까지 찾아가고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기까지 했다. 자영업을 하는 분이라 열렬히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경찰공무원인 나의 신상에 영향이 미칠까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형님을 무주로 내려오라고 해서 구천동 구경도 하고 10일간 쉬다가 선거가 끝난 다음 서울로 돌아가게 했다. 이 이야기는 형님과 나 사이에 두고두고 재미있는 화제가 되었다.
김대중이 온갖 고난을 겪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얼마나 그분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을까는 짐작할 만하다. 장관자리라도 노리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전혀 이익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맹신자가 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연세대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문병을 했느냐고 전화를 했다. 가보아야 할 텐데 사업상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얼큰하게 한잔 하고 조문했느냐고 묻기도 전에 국회의사당 영결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38년 전 무주 얘기가 빠질 수 없고 그분의 훌륭한 점을 어찌나 길게 늘어놓던지 그만하고 뉴스나 듣자며 전화를 끊었다.
북한에 많이 퍼주고 북한에서는 그 돈으로 핵무기를 제조했다는 말이 많았다. 햇볕으로 핵을 만들었으니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야한다고 비아냥댄 글이 인터넷에 떴었다. 정치를 하면서 치부를 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노벨평화상을 돈으로 샀다고 악평을 한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평은 죽은 뒤에 제대로 나온다. 공과(功過)의 평가가 병존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뿐이고 노벨상을 받아 한국의 명예를 드높인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 상을 국가에 바친 셈이다.
내가 특히 그분이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보다 화해와 용서를 몸소 실천했다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는 교도소에서 죄수의 몸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쌓았다는 점이다. 굳이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운 고집이다. 북한에 김대중과 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진즉 세습체제가 붕괴되고 민주화가 되어 남과 북이 통일되었을 것이다. 후광, 인동초, 토마스 모어 김대중,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8.23.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수홍
김대중(金大中)! 이름 참 좋다. 나는 작명가도 아니요 이름풀이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부르기 좋고 쓰기 좋으니 얼마나 좋은가. 인물 좋고 이름이 좋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가 보다.
8월 18일 오후, 건지산 체련공원 축구장 옆 벤치에서 자주 만나는 노신사로부터 그분의 서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육체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라 연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소식은 충격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 그로 인해서 돌아가셨다. 금년은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돌아가시는 운세의 해란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다음날 건지산에 오를 때 앞에 가는 젊은 여자 세 사람의 대화내용이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마다 그게 화제요, 각종 매스컴마다 온통 그 뉴스로 돼를 하고 있다. 한반도가 펄펄 끓는 듯하다. 오늘이 처서인데도 날씨가 따갑고 화끈거리는 것이 그 영향인 듯싶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시작하여 하도 유명한 말과 어록이 많아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나 해야겠다.
1971년도 내가 무주경찰서 수사과장으로 근무할 때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김대중이 김영삼을 물리치고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대결했다. 그때는 공공연히 공무원더러 집권여당의 선거운동을 하라고 했었다. 경찰서 과장들도 각 면을 담당하여 운동하라고 했다. 아직 민주화가 되지 않은 때라 공무원의 선거운동은 잘 먹혀들었다. 생각하면 공무원의 선거운동은 선량한 국민에 대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개표결과 표가 적게 나오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까봐 찍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반 조장행정기관은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협박이고, 경찰은 불법행위를 했을 때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라고나 할까.
각 시군을 담당하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감시하고 있어 일과시간에도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담당 면에 나가 이장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원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동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권이 바뀔 테니 너무 적극적으로 운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은 약국을 운영하는 申모와 신문사 지국장 朴씨 그리고 李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야당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사과장은 야당들과 친한 사람이라고 찍혀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판에 남원 동서의 전화는 나를 웃게 하였다. 이럴 때 웃음을 회소(詼笑)(실없이 웃는 웃음)라고 한다던가.
그때 서울 사는 형님은 전라도 사람이라 그러기도 했지만 김대중을 무척 좋아했다. 정치, 경제, 사회라고 하지 않은가, 정치가 민생의 근본이라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연설에 반해서 맹신자가 되어버렸다. 수원에서 유세가 있다면 그곳까지 찾아가고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기까지 했다. 자영업을 하는 분이라 열렬히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경찰공무원인 나의 신상에 영향이 미칠까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형님을 무주로 내려오라고 해서 구천동 구경도 하고 10일간 쉬다가 선거가 끝난 다음 서울로 돌아가게 했다. 이 이야기는 형님과 나 사이에 두고두고 재미있는 화제가 되었다.
김대중이 온갖 고난을 겪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얼마나 그분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을까는 짐작할 만하다. 장관자리라도 노리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전혀 이익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맹신자가 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연세대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문병을 했느냐고 전화를 했다. 가보아야 할 텐데 사업상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얼큰하게 한잔 하고 조문했느냐고 묻기도 전에 국회의사당 영결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38년 전 무주 얘기가 빠질 수 없고 그분의 훌륭한 점을 어찌나 길게 늘어놓던지 그만하고 뉴스나 듣자며 전화를 끊었다.
북한에 많이 퍼주고 북한에서는 그 돈으로 핵무기를 제조했다는 말이 많았다. 햇볕으로 핵을 만들었으니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야한다고 비아냥댄 글이 인터넷에 떴었다. 정치를 하면서 치부를 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노벨평화상을 돈으로 샀다고 악평을 한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평은 죽은 뒤에 제대로 나온다. 공과(功過)의 평가가 병존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뿐이고 노벨상을 받아 한국의 명예를 드높인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 상을 국가에 바친 셈이다.
내가 특히 그분이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보다 화해와 용서를 몸소 실천했다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는 교도소에서 죄수의 몸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쌓았다는 점이다. 굳이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운 고집이다. 북한에 김대중과 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진즉 세습체제가 붕괴되고 민주화가 되어 남과 북이 통일되었을 것이다. 후광, 인동초, 토마스 모어 김대중,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8.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