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 고맙다/김학
2009.12.07 07:15
수필아, 고맙다
김 학
“수필아, 고맙다!”
나는 요즘 날마다 수필에게 절이라도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수필은 나에게 엔도르핀보다 4천 배나 더 성능이 좋다는 다이돌핀을 퐁퐁 솟아나게 해 주는 소중한 친구다.
2009년의 마지막 달력 12월이 열리자마자 첫날 새벽부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과 집전화가 잇따라 울려대는 것이었다. 내가 제17회 목정문화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그날 일제히 도하신문에 크게 보도된 까닭이다. 이른 아침에 조간신문을 읽은 지인들은 다투다시피 축하전화를 해 주었다. 그날 내 핸드폰과 집 전화는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 과로를 했다. 전화만 고생한 게 아니었다. 컴퓨터를 열어 보니 e-mail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내 눈과 내 귀 그리고 내 입도 무척 바빴던 게 사실이다. 고희를 눈앞에 둔 나로서는 어머니의 몸에서 독립한 이래 가장 기쁘고 바쁜 하루를 보낸 셈이다. 이 역시 다정한 내 친구, 수필이 베풀어 준 혜택이다. 내가 수필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큰상을 받고 이렇게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성급한 어떤 친구들은 천만 원이나 되는 상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며 다짜고짜 상금의 용처부터 묻기도 했다. 축하를 해 주는 이들도 가지가지였다. 큰상에 초점을 맞추어 축하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두툼한 상금을 들먹이며 축하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쩌다 내가 수필과 사귀어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 눈이 떠졌다.
내가 수필과 사귀기 시작한 지는 어느새 반백 년 가까이 된다. 내가 처음으로 수필이라고 쓴 건 1962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웃사이더의 사랑 이야기>란 흉내 내기 수필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했었다. 그때는 반응이 좋아서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뒤부터 꾸준히 수필과 친교를 나누며 다정하게 지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필을 향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고 하는 게 옳다.
또 서해방송 프로듀서가 된 뒤 나는 수필과 더 가까워졌다. 1970년대 초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을 맡아 2년 반 동안 날마다 수필 한 편씩을 써서 그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 방송을 했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 대한 청취자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수필가도 아니면서 날마다 글을 한 편씩 썼으니 얼마나 고충이 컸겠는가?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수필쓰기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요즘 허위허위 고희의 고개를 오르면서 되돌아보니 내가 많은 예술장르 가운데서 문학을, 또 그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서 수필을 추켜 든 건 아주 잘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수필집 10권을 비롯하여 11권의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내게 베풀어 준 시혜(施惠)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목정문화상(牧汀文化賞)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또 크고 작은 문학단체의 회장을 두루 맡아 지역사회 문학발전에 조그만 힘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나에게 수필가란 타이틀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정년퇴직 이후 나에게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삶의 보람을 가져다 준 것도 수필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수필을 사랑하는 후배들과 함께 수필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년퇴직 이후 누구나 느끼는 허무감과 무력감을 맛볼 짬도 없이 나는 즐겁고 보람차게 나의 2모작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와 동고동락하는 후배들이 좋은 수필을 써서 하나둘씩 등단을 하고, 여기저기서 문학상을 타며, 자신의 수필집을 출간하는 걸 보면 내 몸에서는 엔도르핀이 아니라 다이돌핀이 퐁퐁 솟는다. 그것은 수필이 나에게 주는 특별 보너스다. 수필이 주는 기쁨이 하나 더 있다. 문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2008년부터 중앙교육이 출간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내 작품 <수필, 그 30초 전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수필아,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 학
“수필아, 고맙다!”
나는 요즘 날마다 수필에게 절이라도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수필은 나에게 엔도르핀보다 4천 배나 더 성능이 좋다는 다이돌핀을 퐁퐁 솟아나게 해 주는 소중한 친구다.
2009년의 마지막 달력 12월이 열리자마자 첫날 새벽부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과 집전화가 잇따라 울려대는 것이었다. 내가 제17회 목정문화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그날 일제히 도하신문에 크게 보도된 까닭이다. 이른 아침에 조간신문을 읽은 지인들은 다투다시피 축하전화를 해 주었다. 그날 내 핸드폰과 집 전화는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 과로를 했다. 전화만 고생한 게 아니었다. 컴퓨터를 열어 보니 e-mail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내 눈과 내 귀 그리고 내 입도 무척 바빴던 게 사실이다. 고희를 눈앞에 둔 나로서는 어머니의 몸에서 독립한 이래 가장 기쁘고 바쁜 하루를 보낸 셈이다. 이 역시 다정한 내 친구, 수필이 베풀어 준 혜택이다. 내가 수필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큰상을 받고 이렇게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성급한 어떤 친구들은 천만 원이나 되는 상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며 다짜고짜 상금의 용처부터 묻기도 했다. 축하를 해 주는 이들도 가지가지였다. 큰상에 초점을 맞추어 축하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두툼한 상금을 들먹이며 축하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쩌다 내가 수필과 사귀어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 눈이 떠졌다.
내가 수필과 사귀기 시작한 지는 어느새 반백 년 가까이 된다. 내가 처음으로 수필이라고 쓴 건 1962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웃사이더의 사랑 이야기>란 흉내 내기 수필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했었다. 그때는 반응이 좋아서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뒤부터 꾸준히 수필과 친교를 나누며 다정하게 지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필을 향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고 하는 게 옳다.
또 서해방송 프로듀서가 된 뒤 나는 수필과 더 가까워졌다. 1970년대 초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을 맡아 2년 반 동안 날마다 수필 한 편씩을 써서 그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 방송을 했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 대한 청취자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수필가도 아니면서 날마다 글을 한 편씩 썼으니 얼마나 고충이 컸겠는가?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수필쓰기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요즘 허위허위 고희의 고개를 오르면서 되돌아보니 내가 많은 예술장르 가운데서 문학을, 또 그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서 수필을 추켜 든 건 아주 잘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수필집 10권을 비롯하여 11권의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내게 베풀어 준 시혜(施惠)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목정문화상(牧汀文化賞)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또 크고 작은 문학단체의 회장을 두루 맡아 지역사회 문학발전에 조그만 힘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나에게 수필가란 타이틀을 붙여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정년퇴직 이후 나에게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삶의 보람을 가져다 준 것도 수필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수필을 사랑하는 후배들과 함께 수필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년퇴직 이후 누구나 느끼는 허무감과 무력감을 맛볼 짬도 없이 나는 즐겁고 보람차게 나의 2모작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와 동고동락하는 후배들이 좋은 수필을 써서 하나둘씩 등단을 하고, 여기저기서 문학상을 타며, 자신의 수필집을 출간하는 걸 보면 내 몸에서는 엔도르핀이 아니라 다이돌핀이 퐁퐁 솟는다. 그것은 수필이 나에게 주는 특별 보너스다. 수필이 주는 기쁨이 하나 더 있다. 문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2008년부터 중앙교육이 출간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내 작품 <수필, 그 30초 전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수필아,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