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우리 집 10대 뉴스
2009.12.16 12:15
기쁨과 영광으로 수놓은 한 해
-2009년 우리 집 10대 뉴스-
김 학
기축년 소의 해가 저물고 경인년 호랑이의 해가 밝아온다. 2009년은 걸출한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 몇 달 사이를 두고 서거하여 애도의 물결이 넘실거린 해였고, 세계를 휩쓴 신종 플루란 질병 때문에 우리도 잔뜩 움츠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한 해였다. 4대강 사업추진과 미디어 법, 노동조합법 개정 등으로 국회는 늘 시끄럽고 거리에서는 데모대의 요란한 깃발과 현수막이 펄럭이지 않는 날이 없는 한 해였다.
하지만 세월은 어김없이 똑같은 발걸음으로 흐르고 누구나 똑 같이 공평하게 나이를 한 살씩 더 보태게 되었다. 남북, 동서, 여야, 노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 누구나 차별 없이 나이를 한 살씩 더 먹게 된 것이다.
2009년 기축년, 우리 집의 가족사를 정리해 보니 우리 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년에 비하면 기쁨과 영광으로 수놓은 한 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고명딸 김선경 둘째아들 안병훈 출산
서울 잠실에 사는 고명딸 선경이가 4월 25일 둘째아들 안병훈을 낳았다. 병훈이는 서울 청담마리산부인과병원에서 키 52센티미터, 몸무게 3.59킬로그램, 혈액형 A형으로 태어났다. 순산이어서 다행이었다. 서울광운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선경이는 1년간 출산휴직을 하고 모유를 먹이며 둘째를 잘 돌보고 있어서 안심이다. 선경이는 혼자 아들 형제를 보살피노라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둘째, 큰며느리 천지숙 둘째아기 임신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큰며느리가 둘째 아기를 가졌다. 내년 3월에 출산예정이다. 큰손자 동현이가 여섯 살인데도 둘째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마침내 둘째를 갖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번 둘째는 손녀딸이라고 하니 더 기쁘다. 나의 아들딸 2남1녀가 지금까지 손자만 4명을 낳고 손녀가 없어 아쉬웠는데 드디어 내년 3월이면 귀여운 손녀딸이 태어나게 된다. 나는 요즘 아침마다 새로 태어날 손녀딸이 예쁘고, 착하고, 건강하며, 특기를 지닌 슬기로운 아이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부디 큰며느리가 석 달 뒤 귀여운 손녀를 순산하면 좋겠다. 큰아들 정수는 근무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그래서 둘째를 출산할 때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려고 서울에서 의정부로 이사까지 했으니 사돈댁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안심이 된다.
셋째, 나의 제17회 목정문화상(목汀文化賞) 수상
나는 문학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상복이 많은 편이다. 크고 작은 문학상을 10여 개나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목정문화상(문학부문)은 나와 인연이 멀다고 여겼다. 나보다 문단 후배들이 여러 명 그 상을 받았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그 상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로 온 것이다. 처음 목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크게 놀랐었다. 전라북도에서는 상금이 가장 많은 상이기에 전북의 문화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크게 관심을 갖는 상이다. 무주출신 목정 김광수 선생이 제정한 상으로서 우리 고장의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을 받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해야겠고 후진양성에도 더 심혈을 기울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넷째, 나의 수필작품 중앙교육 발행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수록
문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문인들의 꿈이지만 쉽사리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기쁨이 찾아왔다. 나의 수필 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 그 30초 전쟁>이란 작품이 중앙교육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한국저작권협회로부터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기린봉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큰소리로 외치며 자랑하고도 싶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내 작품을 가르치고 배우며 때로는 그 작품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한다고 생각해 보니, 마치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섯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강생 110명 돌파
2001년 9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한지 7년 6개월 만에 수강생이 110명을 돌파했다. 지금까지는 신기록이다. 2001년 첫해에 28명으로 시작한 수필창작반은 세월이 흐르면서 수강생이 불어났다. 1개 반에서 2개반, 3개반, 4개반으로 불어나더니 마침내 2009년 1학기 때 110명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100명을 돌파한 것이다. 이것은 수필창작반의 인기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우리 고장에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2008년부터는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도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35명의 수강생들이 수필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 수강생들 대부분은 <행촌수필문학회>란 동인회에 가입하여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지금까지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 중 100여 명의 회원들이 등단을 했고, 3명의 수강생들이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50여 명의 회원들이 외부 수필 공모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또 35명의 회원들이 자신의 수필집을 출간하여 왕성한 창작실력을 보여주고 있어 흐뭇하다. 2009년 한 해에만 무려 15권의 개인 수필집이 출간되었다. 풍성한 수확이다. 또 행촌수필문학회가 동인지 《행촌수필》을 16호까지 1년에 두 권씩 꾸준히 발간한 것도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섯째, 손자 김동윤 미국에서 돌잔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사는 둘째아들 김창수와 며느리 최수영 사이에 태어난 손자 동윤이는 2009년 3월 18일 그곳에서 돌을 맞았다. 가난한 유학생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까닭에 성대한 돌잔치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동윤이 모자가 3월 하순에 일시 귀국하였기에 서울에서 2남1녀와 손자들 그리고 우리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회식을 하며 동윤이의 돌잔치를 가졌다. 나는 동윤이에게 행운의 열쇠를 주며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일곱째, 종합문예지 《월간문학》 수필 월평 4개월 집필
한국문인협회가 발간하는 종합문예지 《월간문학》은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한 회원이라면 누구나 구독하는 잡지다. 그러기에 여기에 글을 한 편 발표하면 많은 문인들이 읽게 되어 영향력이 크다. 이런 《월간문학》에 2009년 1월부터 4월까지 넉 달 동안 수필 월평을 집필하였다. 지금까지 이 잡지에 네 번째 월평을 집필한 셈이다. 다른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에서도 수필평을 집필해 보았지만 《월간문학》의 월평처럼 파급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여덟째, 나의 체중 조절을 위한 금식활동
만나는 사람마다 몸이 불었다고 인사를 건네니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옷마다 배 둘레가 맞지 않아 입을 수가 없었다. 전주에서 일신당한의원 원장으로 있는 외사촌 동생과의 술자리에서 슬며시 그 말을 꺼냈더니 한의원으로 한 번 나오라고 했다. 7월 초 어느 날 그 한의원에 가서 체지방 검사를 하려고 몸무게를 달아보니 무려 88킬로그램이었다. 외사촌 동생은 나에게 체지방을 빼는 한약을 지어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살빼기 작전은 시작되었다. 처음 4일은 밥을 먹지 않고 팩으로 된 한약 고비탕과 환약을 복용하면서 오이와 당근, 키위만 먹었다. 그 다음 26일 동안은 점심 한 끼만 잡곡밥 반 공기를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고비탕과 환약을 복용하며 채소반찬과 생선만 먹었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셨다. 한 달 뒤에 내 몸무게는 83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고혈압과 당뇨, 비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한의사 외사촌 동생의 도움으로 체중이 조금 줄어들었다. 없어서 못 먹던 옛날의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리며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먹을거리가 푸짐한 세상에 억지로 굶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칼하기도 했다. 살빼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2009년 7월 27일부터 한 달 동안은 내가 내 위장에게 휴가를 준 기간이었다.
아홉째,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문학분야 심사위원장으로 활동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전라북도 문화예술과로부터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문학분야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김동수 시인, 김영 시인, 소재호 시인, 최영 시인, 임명진 평론가 등이 심사를 맡게 되었는데 그들은 연장자인 나에게 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권했다. 한정된 예산을 쪼개어 지원을 신청한 문학단체에 나누어 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예산이 지금보다 열배쯤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열 번째, 나의 전용 컴퓨터 신품으로 교체
컴퓨터 중고품을 샀더니 몇 년 쓰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잦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1월초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삼성전자의 신제품으로 바꾸었다. 새 제품은 역시 사용하기에 편하고 좋았다. 본체의 용량도 크고 모니터 크기도 22인치로 바꾸니 컴퓨터 앞에서 떠나기가 싫을 정도다. 이 컴퓨터야말로 수필창작반 수강생들과 나 사이에 없어서는 아니 될 소통기구가 아닐 수 없다. 이 컴퓨터가 중간에서 잘 도와주어야 한다. 이 컴퓨터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다.
2009년 기축년은 명실 공히 풍성한 열매를 거둔 한 해였다. 해마다 올해만 같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이 일취월장하며 좋은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문하생들을 만나는 일은 나의 청복(淸福)이다.
다사다난했던 2009 기축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10 경인년 호랑이해가 다가온다. 부디 새해에는 경제가 살아나고 정치가 안정되며 국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우리 가족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용감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으면 한다. 이웃은 누구나 나의 라이벌이 아니라 나의 도우미라 여기고 늘 고마워하며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자고 권하고 싶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우리 집 가훈을 가슴에 새겨두고 또 ‘우리 집 행사표’를 자주 들여다보면서 필요할 때마다 축하와 위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2009년 우리 집 10대 뉴스-
김 학
기축년 소의 해가 저물고 경인년 호랑이의 해가 밝아온다. 2009년은 걸출한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 몇 달 사이를 두고 서거하여 애도의 물결이 넘실거린 해였고, 세계를 휩쓴 신종 플루란 질병 때문에 우리도 잔뜩 움츠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한 해였다. 4대강 사업추진과 미디어 법, 노동조합법 개정 등으로 국회는 늘 시끄럽고 거리에서는 데모대의 요란한 깃발과 현수막이 펄럭이지 않는 날이 없는 한 해였다.
하지만 세월은 어김없이 똑같은 발걸음으로 흐르고 누구나 똑 같이 공평하게 나이를 한 살씩 더 보태게 되었다. 남북, 동서, 여야, 노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 누구나 차별 없이 나이를 한 살씩 더 먹게 된 것이다.
2009년 기축년, 우리 집의 가족사를 정리해 보니 우리 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년에 비하면 기쁨과 영광으로 수놓은 한 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고명딸 김선경 둘째아들 안병훈 출산
서울 잠실에 사는 고명딸 선경이가 4월 25일 둘째아들 안병훈을 낳았다. 병훈이는 서울 청담마리산부인과병원에서 키 52센티미터, 몸무게 3.59킬로그램, 혈액형 A형으로 태어났다. 순산이어서 다행이었다. 서울광운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선경이는 1년간 출산휴직을 하고 모유를 먹이며 둘째를 잘 돌보고 있어서 안심이다. 선경이는 혼자 아들 형제를 보살피노라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둘째, 큰며느리 천지숙 둘째아기 임신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큰며느리가 둘째 아기를 가졌다. 내년 3월에 출산예정이다. 큰손자 동현이가 여섯 살인데도 둘째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마침내 둘째를 갖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번 둘째는 손녀딸이라고 하니 더 기쁘다. 나의 아들딸 2남1녀가 지금까지 손자만 4명을 낳고 손녀가 없어 아쉬웠는데 드디어 내년 3월이면 귀여운 손녀딸이 태어나게 된다. 나는 요즘 아침마다 새로 태어날 손녀딸이 예쁘고, 착하고, 건강하며, 특기를 지닌 슬기로운 아이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부디 큰며느리가 석 달 뒤 귀여운 손녀를 순산하면 좋겠다. 큰아들 정수는 근무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그래서 둘째를 출산할 때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려고 서울에서 의정부로 이사까지 했으니 사돈댁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안심이 된다.
셋째, 나의 제17회 목정문화상(목汀文化賞) 수상
나는 문학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상복이 많은 편이다. 크고 작은 문학상을 10여 개나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목정문화상(문학부문)은 나와 인연이 멀다고 여겼다. 나보다 문단 후배들이 여러 명 그 상을 받았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그 상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로 온 것이다. 처음 목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크게 놀랐었다. 전라북도에서는 상금이 가장 많은 상이기에 전북의 문화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크게 관심을 갖는 상이다. 무주출신 목정 김광수 선생이 제정한 상으로서 우리 고장의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을 받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해야겠고 후진양성에도 더 심혈을 기울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넷째, 나의 수필작품 중앙교육 발행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수록
문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문인들의 꿈이지만 쉽사리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기쁨이 찾아왔다. 나의 수필 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 그 30초 전쟁>이란 작품이 중앙교육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한국저작권협회로부터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기린봉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큰소리로 외치며 자랑하고도 싶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내 작품을 가르치고 배우며 때로는 그 작품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한다고 생각해 보니, 마치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섯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강생 110명 돌파
2001년 9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한지 7년 6개월 만에 수강생이 110명을 돌파했다. 지금까지는 신기록이다. 2001년 첫해에 28명으로 시작한 수필창작반은 세월이 흐르면서 수강생이 불어났다. 1개 반에서 2개반, 3개반, 4개반으로 불어나더니 마침내 2009년 1학기 때 110명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100명을 돌파한 것이다. 이것은 수필창작반의 인기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우리 고장에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2008년부터는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도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35명의 수강생들이 수필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 수강생들 대부분은 <행촌수필문학회>란 동인회에 가입하여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지금까지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 중 100여 명의 회원들이 등단을 했고, 3명의 수강생들이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50여 명의 회원들이 외부 수필 공모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또 35명의 회원들이 자신의 수필집을 출간하여 왕성한 창작실력을 보여주고 있어 흐뭇하다. 2009년 한 해에만 무려 15권의 개인 수필집이 출간되었다. 풍성한 수확이다. 또 행촌수필문학회가 동인지 《행촌수필》을 16호까지 1년에 두 권씩 꾸준히 발간한 것도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섯째, 손자 김동윤 미국에서 돌잔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사는 둘째아들 김창수와 며느리 최수영 사이에 태어난 손자 동윤이는 2009년 3월 18일 그곳에서 돌을 맞았다. 가난한 유학생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까닭에 성대한 돌잔치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동윤이 모자가 3월 하순에 일시 귀국하였기에 서울에서 2남1녀와 손자들 그리고 우리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회식을 하며 동윤이의 돌잔치를 가졌다. 나는 동윤이에게 행운의 열쇠를 주며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일곱째, 종합문예지 《월간문학》 수필 월평 4개월 집필
한국문인협회가 발간하는 종합문예지 《월간문학》은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한 회원이라면 누구나 구독하는 잡지다. 그러기에 여기에 글을 한 편 발표하면 많은 문인들이 읽게 되어 영향력이 크다. 이런 《월간문학》에 2009년 1월부터 4월까지 넉 달 동안 수필 월평을 집필하였다. 지금까지 이 잡지에 네 번째 월평을 집필한 셈이다. 다른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에서도 수필평을 집필해 보았지만 《월간문학》의 월평처럼 파급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여덟째, 나의 체중 조절을 위한 금식활동
만나는 사람마다 몸이 불었다고 인사를 건네니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옷마다 배 둘레가 맞지 않아 입을 수가 없었다. 전주에서 일신당한의원 원장으로 있는 외사촌 동생과의 술자리에서 슬며시 그 말을 꺼냈더니 한의원으로 한 번 나오라고 했다. 7월 초 어느 날 그 한의원에 가서 체지방 검사를 하려고 몸무게를 달아보니 무려 88킬로그램이었다. 외사촌 동생은 나에게 체지방을 빼는 한약을 지어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살빼기 작전은 시작되었다. 처음 4일은 밥을 먹지 않고 팩으로 된 한약 고비탕과 환약을 복용하면서 오이와 당근, 키위만 먹었다. 그 다음 26일 동안은 점심 한 끼만 잡곡밥 반 공기를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고비탕과 환약을 복용하며 채소반찬과 생선만 먹었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셨다. 한 달 뒤에 내 몸무게는 83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고혈압과 당뇨, 비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한의사 외사촌 동생의 도움으로 체중이 조금 줄어들었다. 없어서 못 먹던 옛날의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리며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먹을거리가 푸짐한 세상에 억지로 굶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칼하기도 했다. 살빼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2009년 7월 27일부터 한 달 동안은 내가 내 위장에게 휴가를 준 기간이었다.
아홉째,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문학분야 심사위원장으로 활동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전라북도 문화예술과로부터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문학분야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김동수 시인, 김영 시인, 소재호 시인, 최영 시인, 임명진 평론가 등이 심사를 맡게 되었는데 그들은 연장자인 나에게 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권했다. 한정된 예산을 쪼개어 지원을 신청한 문학단체에 나누어 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예산이 지금보다 열배쯤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열 번째, 나의 전용 컴퓨터 신품으로 교체
컴퓨터 중고품을 샀더니 몇 년 쓰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잦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1월초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삼성전자의 신제품으로 바꾸었다. 새 제품은 역시 사용하기에 편하고 좋았다. 본체의 용량도 크고 모니터 크기도 22인치로 바꾸니 컴퓨터 앞에서 떠나기가 싫을 정도다. 이 컴퓨터야말로 수필창작반 수강생들과 나 사이에 없어서는 아니 될 소통기구가 아닐 수 없다. 이 컴퓨터가 중간에서 잘 도와주어야 한다. 이 컴퓨터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다.
2009년 기축년은 명실 공히 풍성한 열매를 거둔 한 해였다. 해마다 올해만 같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이 일취월장하며 좋은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문하생들을 만나는 일은 나의 청복(淸福)이다.
다사다난했던 2009 기축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10 경인년 호랑이해가 다가온다. 부디 새해에는 경제가 살아나고 정치가 안정되며 국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우리 가족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용감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으면 한다. 이웃은 누구나 나의 라이벌이 아니라 나의 도우미라 여기고 늘 고마워하며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자고 권하고 싶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우리 집 가훈을 가슴에 새겨두고 또 ‘우리 집 행사표’를 자주 들여다보면서 필요할 때마다 축하와 위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